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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동맹파 갈등이 그림 탓? ‘도약’이 왜 ‘혼비백산’ 됐나

외교부 청사 미술품 '도약' 전시 교체로 본 외교와 예술
15년간 외교부 청사의 로비를 지켜온 그림 ‘도약’(유화)의 전시가 중단된다. 한때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는 말들 때문에 외교부에 나쁜 기운을 준다는 ‘누명’도 썼지만 국운 상승을 꾀한다는 취지의 ‘각개약진도’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다. [강정현 기자]

15년간 외교부 청사의 로비를 지켜온 그림 ‘도약’(유화)의 전시가 중단된다. 한때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는 말들 때문에 외교부에 나쁜 기운을 준다는 ‘누명’도 썼지만 국운 상승을 꾀한다는 취지의 ‘각개약진도’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다. [강정현 기자]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다. 서울 도렴동에 위치한 외교부 청사에 이런 ‘조상’ 같은 존재가 있다. 한 일이라고는 묵묵히 로비 한 편을 지킨 게 전부인데 외교부에 안 좋은 일만 생기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곤 했다. 사람이 아니라 청사 1층 로비에 있는 대형 말 그림 이야기다.
 
이 작품은 세로 12m, 가로 2.5m 크기의 ‘도약(Jump)’이라는 제목의 유화다. 2002년 12월 외교부가 새로 지어진 정부중앙청사 별관 청사로 이전할 때 행정자치부가 대한미술협회에 특별히 의뢰, 2억5000만원을 들여 제작했다. 서양화가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다.
 
지난 15년 꼬박 외교부 청사와 운명을 함께한 ‘도약’이 조만간 자리를 떠난다. 외교부 관계자는 “검사 결과 작품 일부에 가루화가 시작된 부분이 있었다. 다른 곳으로 옮겨 정밀 진단을 통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곧 사라질 ‘도약’을 바라보는 외교부 사람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스무 마리의 말이 갈기를 날리며 힘찬 몸짓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사실 부 내에서 ‘혼비백산도’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다. 공교롭게도 작품을 건 직후부터 외교부에 흉흉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 용산기지 이전 협상 당시 청와대가 “북미국이 미국에 편향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문책하며 표면에 드러난 이른바 자주파-동맹파 갈등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2004년 1월 노무현 정부의 초대 외교장관인 윤영관 장관이 경질됐다. 2004년 6월에는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적 충격은 정부의 외교력 부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과 맞물리며 거센 반미 감정까지 일었다.
 
이를 즈음해 외교부의 ‘말 탓’이 시작됐다. 이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쳐들고 달리는 말들이 외교부의 기운을 흩어놓는다”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금 외교부의 모습이 작품 속 말들 같다” 등의 수군거림이 나왔다.
 
반기문 장관(2004년 1월~2006년 11월 재임)이 2004년 8월 기자간담회에서 “객담이지만 말들의 방향이 제각각이어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못 잡는 것 같다. 이 그림 대신 꿈을 꾸게 하는 그림을 갖다놔야 하는데”라고 말했을 정도다. 2층 메인 로비의 정면에 걸려 청사에 들어오는 이들의 첫 시선을 사로잡곤 했던 그림이 1층으로 내려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외교부는 그림을 떼려고도 해봤지만, 행자부가 계약한 전시 기간이 남아 있어 불가능했다. 그러자 그림의 기를 누르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이뤄졌다. ‘조·미 수호통상조약’ 등 중요 외교문서를 전시물로 만들어 그림 주변에 배치했다. ‘순국선열’까지 등장했다. 지금은 2층 로비에 전시된 헤이그 특사 사진 액자, 외교부 순직자 명단을 새긴 동판 등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에선 ‘도약’의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약진하는 말처럼 국운을 높이자는 본래 취지가 다시 부각됐다. 외교가에선 ‘혼비백산도’ 대신 ‘각개약진도’라는 새로운 별명도 지어 줬다.
 
‘도약’은 곧 사라지지만 외교부 청사에는 웬만한 미술관에서도 보기 힘든 명작들이 여럿 숨어 있다. 외빈들이 많이 찾는 외교부의 예술품은 한국을 알리고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는 외교 수단 역할을 한다.
 
외교부 청사 17층 ‘산수화’.

외교부 청사 17층 ‘산수화’.

외교부가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은 4000점이 넘고, 취득가와 추정가는 약 140억원이다. 이 중 ‘대표선수’는 17층 장관 집무실 옆에 붙어 있는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의 수묵화 ‘산수화’다. 이상범 화백은 대한민국 동양화의 토대를 닦은 거장이다. 청사에 걸려 있는 ‘산수화’는 그의 작품 중 가로 길이가 가장 긴 대형작이다. 추정가액만 놓고 보면 외교부 청사에 있는 예술품 중 최고가다(5억원 추정).
 
대접견실의 ‘농원’ 앞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1일 잭 리드 미 상원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대접견실의 ‘농원’ 앞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1일 잭 리드 미 상원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산수화’를 지나 대접견실로 들어가면 이대원 화백(1921~2005)의 대형 유화 ‘농원’이 걸려 있다. 에너지가 충만한 원색으로 한국을 표현했다. 역대 장관 모두 외빈들과 ‘농원’ 앞에서 악수하며 사진을 찍곤 했다. 양자 외교를 전담하는 1차관 접견실(17층)의 경우 지리산을 찍은 사진을 한지 느낌이 나는 대형 인화지에 출력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선과 선’, 주기중 전 중앙일보 사진부장 작품).
 
외교부 청사 18층 ‘감은사지석탑’.

외교부 청사 18층 ‘감은사지석탑’.

청사의 가장 꼭대기 층인 18층 리셉션홀 앞에는 한성필 작가의 사진 작품 ‘감은사지석탑’이 걸려 있다.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창건했다. “죽어서도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기운을 받아 국가 수호의 의지를 다지자는 뜻으로 이 작품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 외교부 청사는 어떨까. 워싱턴에 있는 미 국무부 청사 로비에 들어서면 성조기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기가 게양된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장관실과 부장관실이 있는 청사 7~8층에는 역대 장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도쿄에 있는 일본 외무성 청사 1층 로비에는 외상의 활동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뒤뜰에는 존경받는 외교관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한국 외교부 청사에는 초상화나 동상이 없다. 대신 18층 리셉션홀 뒤쪽 벽면에 역대 외교부 장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큐레이터 출신인 선승혜 문화교류협력과장은 “유교 문화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조선시대 때 왕들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 관복 초상을 하사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18층의 장관들 사진이 ‘현대판 관복 초상’인 셈이다.
 
[S BOX] 책장 그린 병풍 ‘책가도’ 강경화 장관 공관에 새로 설치
임석환 책가도

임석환 책가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외교부 장관 공관에도 미술품들이 다수 전시돼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공관의 작품들을 일부 교체해 분위기를 바꿨다.
 
변화는 입구부터 시작됐다. 공관을 찾는 외빈들이 직접 메시지를 적는 방명록이 놓여진 탁상 뒤로 중요무형문화재 118호 불화장 보유자인 임석환씨의 책가도(冊架圖·책 등이 책장에 가지런히 진열돼 있는 그림·사진) 병풍이 들어섰다. 조선 시대 때 정조(재위기간 1776~1800년)가 왕의 권위를 상징했던 일월도 대신 책가도 병풍을 뒤에 뒀다. 17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서재를 그린 ‘스투디올로’가 청나라로 넘어왔고, 정조가 이를 조선에 도입했다. 장관 공관에 이 작품이 들어온 것도 국제화를 지향했던 정조의 정신을 되새기는 의미라고 한다.
 
무거운 느낌의 추상화는 일부 들어냈다. 수묵화로 도시적인 서울 풍경을 담은 박병일 작가의 ‘Breath-여의도’ 등이 새로 배치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공관은 고위급 외교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강 장관이 편안하게 느끼며 외교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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