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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저항의지와 통합의 힘, 중국도 겁내는 베트남 이뤘다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호찌민의 국가전략과 지압의 군사실천 
하노이의 바딘광장 옆 호찌민 기념관에 있는 호찌민 전신상. 그는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외침은 조국 수호의 투지를 국민 속에 전파했다.

하노이의 바딘광장 옆 호찌민 기념관에 있는 호찌민 전신상. 그는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외침은 조국 수호의 투지를 국민 속에 전파했다.

베트남은 장렬하다. 그 이미지는 저항과 고난, 승리다. 강대국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한다. 중국은 베트남을 조심한다. 하지만 중국은 한국을 함부로 대한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치졸하고 끈질기다. 그 대비 장면은 자극제다. 베트남의 역사 현장을 찾게 한다.

 
20세기 후반 베트남은 전쟁에서 전승했다. 프랑스·미국·중국을 차례로 물리쳤다. 드라마의 영원한 주연은 호찌민(胡志明·1890~1968). 그는 나라를 세웠다. 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다. 그의 건국은 시련을 맞는다. 그해 가을 프랑스 군대는 옛 식민지에 진주했다. 그는 ‘인민전쟁’의 깃발로 맞섰다.
 
프랑스와의 전쟁(1946~54년) 최후 격전지는 디엔비엔푸다. 베트남 북서쪽 변방의 작은 도시. 중심가에 승전기념상이 서 있다. 조형물은 거대하다(높이 12m). 군인 세 명에다 기관총·국기·꽃다발 어린이가 조각됐다. 글귀가 새겨 있다. “Quyết chiến, Quyết thắng(뀌엣찌엔, 뀌엣탕)”-결전결승(전쟁을 결행하면 승리를 결심)이다. 그 것은 호찌민의 구호다. 그의 투혼이 깔려 있다.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 그런 언어들은 항쟁의 신화를 생산한다. 승전의 지휘는 보 구엔 지압 (1911~2003) 장군이 맡았다.  
 
호찌민시(옛 사이공) 통일궁에 전시된 T-59전차.

호찌민시(옛 사이공) 통일궁에 전시된 T-59전차.

1975년 대통령궁 진입 장면. 중앙포토

1975년 대통령궁 진입 장면. 중앙포토

지압의 방식은 상대방 허(虛) 찌르기다. 기습의 핵심은 산 정상(800m)에 105mm 곡사포 설치. 30여 병사가 대포를 밧줄로 묶는다. 한 번에 30~50㎝쯤(하루 50m) 끌어 올렸다. 그 집념이 승패를 갈랐다. 그곳을 안내해 준 응 우옌 타잉(46)은 역사교사다. 그는 “베트남은 단호하고 대담하게 외세를 물리쳐 왔다. 조국 방어의 투지가 없는 나라와 국민은 깔보인다”고 했다. 그의 자부심은 마키아벨리를 떠올리게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군주론). 경멸은 리더십의 결단 부족에서 비롯된다.
 
프랑스는 떠났다. 하지만 베트남은 나눠졌다. 북쪽엔 월맹(북베트남), 남쪽은 월남으로 갈렸다. 호찌민에게 닥친 시련은 컸다. 미국과의 전쟁(1965~73년)이다. 바딘 광장은 수도 하노이의 상징이다. 그 옆에 호찌민의 옛 집은 관광코스다. 그곳에서 성실·청빈과 간소함을 만난다. 거기에 그의 친근한 애칭 ‘박 호’ (Bác Hồ 호 아저씨)는 살아 있다. 그런 자세는 국민 통합의 열정을 키운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무기를 투입했다. 가난한 나라의 군대는 폐(廢)타이어 샌들을 신었다. 국방장관 지압의 전술은 파격과 도전이다. 미군의 골리앗 정공법은 무너졌다. 호찌민(월남 당시엔 사이공)시의 전쟁박물관.- 그곳에서 한 장의 사진이 나를 붙잡는다. 1995년 하노이에서 로버트 맥나마라(전쟁 당시 미 국방장관)가 지압을 만나는 모습이다. 나는 지압과의 서면 인터뷰 내용(그의 나이 100세 때)을 기억했다. 지압은 “미국은 베트남의 역사·지리·문화·풍습은 물론 지도자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베트남을 침략했다”고 회고했다. 맥나마라는 전쟁의 좌절을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실패에서 찾았다. 그 사진은 한국인에게 묻는듯하다. “한국 지도층들은 핵무장한 북한의 행태·문화·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나.”
 
2차 대전 후 베트남의 첫 외세는 연합국인 중국과 영국이었다. 북쪽에 20만의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가 들어왔다. 남쪽의 영국군은 프랑스군에게 권한을 넘겼다. 호찌민은 우선순위를 짰다. 선(先) 중국군, 후(後) 프랑스군의 철수다. 하노이의 친중파들은 반발했다.
 
호찌민(왼쪽)과 보 구엔 지압. 중앙포토

호찌민(왼쪽)과 보 구엔 지압. 중앙포토

호찌민의 설득은 단호했다. “중국이 우리 땅에 들어오면 1000년을 머문다. 프랑스 식민주의는 죽어간다. 그러나 중국이 주둔한다면 그들은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1000년은 중국 역대 왕조의 베트남 지배 기간이다. 장제스 군대는 물러갔다. 8년 뒤 프랑스는 물러났다. 베트남의 강대국 다루기는 슬기롭다. 항전은 강건하다. 전쟁 후엔 유연하다. 애증(愛憎)을 섞는다. 호찌민의 좌우명은 통찰을 담는다. ‘지벗비엔 응번비엔(以不變 應萬變, 이불변 응만변)’-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이다. 그 통치 유산은 생존 기량으로 축적됐다.
 
디엔비엔푸 전쟁 승리기념탑, 아래는 박보균 대기자.

디엔비엔푸 전쟁 승리기념탑, 아래는 박보균 대기자.

디엔비엔푸 승리는 역사적이다. 승전 파티는 화려해야 했다. 하지만 승리 후 베트남의 자세는 겸손해진다. 지압의 군대는 이동했다. 무엉팡 산속의 밀림으로 들어갔다. 디엔비엔푸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다. 그곳에서 조촐한 승전기념식을 열었다. 전투 현장에 수용된 프랑스군 포로는 1만 명. 그들은 적군의 환희를 보지 못했다. 승전기념식은 패전 포로와 분리됐다. 그것은 호찌민의 심모원려(深謀遠慮)다. “승리를 자축하고 우리 군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하라. 프랑스군 포로를 모욕하거나 열등감을 넣지 말라.” 그것은 역사의 지혜다. 국제 관계는 미묘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다. 내일은 다시 바뀔 수 있다.” 그 절제는 숨을 막히게 한다. 내가 찾은 베트남 현장들 중에서 가장 강렬했다. 그 사연은 베트남의 경쟁력이다. 강대국들이 베트남의 저력을 의식하게 한다.
 
1975년 4월 베트남은 공산화 통일됐다. 세상의 질서가 바뀌면 나라 관계가 달라진다. 베트남과 중국 관계는 과거로 복귀했다. 그것은 긴장과 대치다. 베트남은 원공근교(遠攻近交)로 전환했다. 1979년 중국의 베트남 침공은 반격이다. 중국은 망신을 당했다. 하노이 정부는 그 내막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렇게 중국의 체면을 살려 준다. 하노이의 호찌민박물관은 파란의 삶을 담고 있다. 붉은색 표지 위 글자(1968년 간행)가 눈길을 끈다. 『越中友誼 萬古長青』(월중우의 만고장청)- ‘월’은 베트남. 호찌민의 글씨다. 그는 한시(漢詩)도 썼다. 그 무렵 미국과의 전쟁은 치열했다. 중국의 군수 원조는 확충됐다. 그 전시물은 중국과 우호의 전통을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다.
 
하노이의 과거사 접근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가 당한 아픔을 기억해 달라. 하지만 사과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은 군사력을 과시한다. 미국과 베트남은 전략적 제휴를 한다. 지압은 이렇게 말했다 “호찌민 정신대로 단결하고, 저항 의지를 기를 줄 아는 지도자와 국민은 어떤 위기도 극복한다.” 베트남의 강대국 다루기는 전략적 교훈이다. 한국인에게 매력적인 상상력을 제공한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지도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지도

베트남 민병대, 중국정규군 눌렀다 … 양국 모두 분노·추모를 내부소화
 
베트남 랑선과 중국의 핑샹(憑祥)-. 핑샹은 광시성의 국경도시. 그곳 우의관(友誼關)을 지나면 베트남 땅이다. 우의관은 극단적인 역설이다. 중국·베트남 전쟁의 상흔이 담겼다.
 
1979년 2월 17일 중국의 베트남 침공은 전격적이었다. 중국의 우선 목표는 접경 도시의 점령. 여세를 몰아 하노이 진입이다. 랑선에서 하노이는 140㎞. 전세는 혼전 양상이었다. 3월 16일 중국은 “(징벌의) 목표가 달성됐다”고 선언했다. 당일에 중국군은 돌연 철군했다.
 
1979년 전쟁 때 중국군 포로들을 베트남 여성 민병대원이 총을 들고 감시하고 있다. 중앙포토. 호찌민의 휘호 越中友誼 중국과 우의.

1979년 전쟁 때 중국군 포로들을 베트남 여성 민병대원이 총을 들고 감시하고 있다. 중앙포토. 호찌민의 휘호 越中友誼 중국과 우의.

28일간의 전쟁. 그 내막은 특별나다. 전술은 비슷했다. 양군은 손자병법으로 단련했다. 양국의 30년 동맹은 어느 날 적대로 바뀌었다. 통일 베트남의 출현 이후다. 베트남 왕조 역사는 중국과의 투쟁이다. 그 투지와 성향이 되살아났다. 통일 베트남에서 화교(華僑) 재산은 몰수 대상이었다. 베트남의 노선은 친(親)소·반(反)중이었다.
 
79년 1월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미국에서 대통령 카터를 만났다. 그는 응징을 예고했다. “어린 친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엉덩이를 때려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屁股了).”
 
20만의 중국 정규 군대가 진입했다. 베트남 정규부대는 캄보디아에 있었다. 베트남군 주력은 10만의 지역 수비대와 민병대. 그들은 복잡한 산간지형, 엄폐물로 상대를 괴롭혔다. 그것은 지압의 전투 방식이다. 병사들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단련돼 있다. 중국군은 고전했다. 그것은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다. 그 시절 군 원로들은 수모를 당했다. 사기는 낮았다. 장비는 낡았다. 막판에 랑선을 점령했다. 중국은 체면을 세웠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전투 현장에선 사실상 패배다. 피해는 컸다(추정 사망자, 중국 2만6000, 베트남 3만).
 
랑선(인구 10만) 외곽에 공동묘지가 있다. 중국과의 전쟁 전사자들(300여 명)이 묻혀 있다. 노년의 베트남 수비대원은 “이곳엔 조상들이 남긴 경구가 많다”고 했다. 그가 소개한 구절은 인상적이다. “잊지 마라. 강대국들은 자주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거짓 약속을 할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핑샹에는 중국군 묘소가 있다(장지열사능원). 두 나라의 기억 방식은 비슷하다. 분노와 추모를 안에서 소화한다. 양국 모두 상대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S BOX] 베트남군이 없앤 킬링필드의 역설
폴 포트는 킬링필드의 연출자다. 1975년 4월 17일 그의 크메르 루즈는 캄보디아를 장악했다. 그의 공산주의 실험은 광기(狂氣)와 공포로 가득했다. 그의 집권 4년간 150만 명(추정)이 숨졌다. 지식인·기술자·문화 예술인들은 이른바 ‘근절’되었다. 그는 반(反)베트남·친(親)중국 노선을 취했다. 그는 베트남을 자극했다. 그런 기세는 중국의 지원을 믿어서였다. 78년 12월 베트남 정규군 15만 명이 캄보디아에 진입했다. 폴포트 군대는 2주 후 패퇴했다. 인도차이나 질서는 재편됐다. 킬링필드의 참극도 종식했다. 그것은 베트남 승리의 부산물이다. 그 시절 미국 대통령은 카터다. 그는 그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의 대외정책 깃발은 인권이다. 카터는 유신시절 한국의 인권 상황을 질타했다. 하지만 킬링필드에 대한 분노는 제대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중성과 위선의 행태다. 자유에의 전진은 기묘하게 전개된다.

 
하노이·호찌민·디엔비엔푸·랑선=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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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