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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속으로] 대한민국 헌법 영문본엔 ‘She’가 없다

성 중립 필요한 헌법 영문 번역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무위원과 감사원장은 모두 남자여야 한다.’
 
영어로 된 대한민국 헌법만 본 이라면 이렇게 판단할 게다. 더 나아가 “한국 시민도 다 남자인가”라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모두 남성형 명사를 사용해서다.
 
중앙일보 영어신문인 코리아중앙데일리가 1987년 공포된 6공화국 헌법의 공식 영문본을 분석한 결과 모두 37곳에서 성 중립적 표현 대신 남성형 명사나 대명사만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she’나 ‘her’가 사용된 건 단 한 차례도 없다. 영문 헌법 속 대한민국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세종시 어진동에 위치한 대통령기록관에 설치된 대선 과정을 그린 삽화 전시물. 당선인·유권자 등 11명이 등장하는데 모두 남성으로 그려졌다. [강진규 기자]

세종시 어진동에 위치한 대통령기록관에 설치된 대선 과정을 그린 삽화 전시물. 당선인·유권자 등 11명이 등장하는데 모두 남성으로 그려졌다. [강진규 기자]

헌법 제69조에 명시된 대통령 취임선언문의 첫 문장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의 영문본은 ‘The President, at the time of his inauguration, shall take the following oath’다. ‘his or her inauguration’이 아닌 ‘his inauguration’으로 표기함으로써 대통령을 남성으로 한정했다.
 
대통령 궐위 시 필요한 조치를 언급한 헌법 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이라는 문장은 ‘If the office of the presidency is vacant or the President is unable to perform his duties for any reason’으로 표현됐다. 대통령의 직무를 ‘남성의 직무’(his duties)로 썼다.
 
감사원장·법관·군인 역시 남성형 대명사로 지칭했다. 감사원장의 임기를 다룬 헌법 제98조 2항 중 ‘그 임기는 4년으로 하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 중임 부분이 ‘he may be reappointed only once’로 번역됐다. 성 중립적인 영어 표현은 ‘He or she may be reappointed’다.
 
법관의 경우 헌법 제106조 1항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에서도 ‘nor shall he be suspended from office’(정직), ‘his salary reduced’(감봉)란 표현이 등장한다. 현역 군인은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으로 임명될 수 없다는 헌법 제86조 3항과 제87조 4항에서 현역 군인은 ‘unless he is retired from active duty’로 표기됐다. 고위 공직자나 법관·군인은 남성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헌법적 시민기본권 부분에서도 남성형 주어만을 쓴 것이 발견됐다. 헌법 제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No citizen shall suffer unfavorable treatment on account of an act not of his own doing but committed by a relative’로 번역됐다. ‘his or her own doing’이라고 해야 해당 권리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고 명확히 해석될 수 있다.
 
87년 제정 헌법 영문 번역은 당시 법제처 소속 법제조사위원회 위원들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언제 번역 작업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현재 국내 법령 영문 번역을 맡고 있는 한국법제연구원 관계자는 “한국법제연구원은 92년부터 법령 영문 번역을 담당했는데 87년 헌법은 92년 이전에 번역됐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 연도는 확인이 어렵다”며 “일단 헌법 개정이 된다면 해당 개정 사안은 반영하겠지만 개정 전 현 헌법(영문판)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상훈 정치발전학교 소장은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공직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정부 공식 문건에 중립적인 표현을 써야 한다”며 “해당 사안은 번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헌 등의 절차가 필요하지 않은 행정 사안이므로 지체 없이 수정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남성 위주의 사고는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도 배어 있었다. 4층에 있는 대통령 선거 과정을 총 7단계로 그린 대형 그림에는 후보·투표인·선거운동원부터 대통령까지 11명이 등장하는데 모두 남성이었다. 이에 대해 윤준희 기록관 홍보팀장은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며 “개편 작업이 들어가면 해당 삽화도 수정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S BOX] humankind·Chairpersons·clergy … 미국은 성 중립 표현 의무화
2001년 미국 뉴욕주 상원이 주 헌법을 개정했다. 모두 170여 곳이었는데 ‘he’는 모두 ‘he or she’로, ‘to all mankind(모든 사람)’는 ‘to all humankind’로, ‘assemblymen(정치인)’은 ‘Assembly members’로, ‘Chairmen(의장)’은 ‘Chairpersons’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2013년 워싱턴주는 주 법에 있는 남성 중심의 용어를 성 중립적인 표현으로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his’는 ‘his or her’로 바뀌었으며, clergyman(성직자)은 clergy로, 철도 신호원의 뜻을 가진 signalman은 signal operator로 수정되는 등 3500개의 주 법령 성 편향 조항이 수정됐다. 유타·플로리다·로드아일랜드주도 헌법 내 남성 중심 용어를 성 중립적 용어로 수정했다.
 
미국에서 이 같은 운동이 시작된 건 여성운동이 본격화된 1970년대 이후다. 이전까지 남성을 뜻하는 ‘man’이 ‘인간’이라는 의미로 쓰일 만큼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67년 제정된 미 수정헌법 제25조에서도 대통령은 ‘he’로 지칭됐다.
 
여성 전문지 ‘여/성이론’의 박이은실 편집주간은 “미국 역시 남성 중심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가 여성운동 진영에서 꾸준히 제기됨으로써 언어 사용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며 “대한민국 헌법의 공식 영문본에 성 중립적 표현이 도입된다면 대한민국 헌법 역사에 큰 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kang.ji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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