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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김지형 공론화위원장 “중단과 재개의 박빙이 제일 두려운 결과"

 
긴 연휴의 끝자락인 지난 9일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사무실에서 마라톤 회의가 열렸다. 15일로 다가온 최종 공론조사의 결과가 나오면 유의미한 찬반의 편차를 얼마로 볼 지, 박빙이라면 권고안을 어떻게 낼 지에 대한 최종 입장을 마련하기 위해 위원들(총 8인)이 갑론을박을 거듭했다고 한다. 회의장에서 잠시 나와 전화를 받은 김지형(59·전 대법관) 위원장의 목소리에서 초조함·피곤함이 느껴졌다. 그는 "찬반이 박빙으로 갈려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이 꿈에 나올 정도다"고 말했다.  

 
김지형 위원장은 "정책에 대한 판정 기능에 만족하는 공론조사와 달리 조정자적 기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지형 위원장은 "정책에 대한 판정 기능에 만족하는 공론조사와 달리 조정자적 기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지난 7월 24일 출범한 공론화위원회는 지역·성별·연령 등이 통계적으로 대표된 시민 500명을 추렸고 이들 중 지난달 16일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한 478명을 신고리 5ㆍ6호기의 운명을 정할 시민참여단으로 확정했다. 공론화자료집과 동영상 강의 등으로 학습한 이들은 13~15일 합숙토론을 거쳐 15일 공론조사에 임한다. 최종 정책 결정은 정부의 몫이지만 조사 결과에서 '공사 중단' 또는 '공사 재개' 중 하나로 참여단의 의견이 집중되면 정부가 이와 다른 결정을 하기 어렵게 된다. 사실상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운명과 에너지 정책의 변화가 이들에게 달려 있다.
 
'박빙'은 김 위원장이 시작부터 걱정해온 결말이다. 그 경우 강한 톤의 권고안을 내면 "위원회의 자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이 쏟아질 것이고 그렇다고 아무런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공론조사 무용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김 위원장은 "국내외의 선례에선 숙의과정을 거치면 40% 정도가 처음의 생각을 바꾸고 이 과정에서 편차가 뚜렷해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박빙'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론화위원장은 결과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한쪽의 비난을 피하기 어렵고 박빙이면 그에 따른 곤혹스러움을 한 몸에 떠안아야 하는 자리다. 2014년 10월부터 1년 반 동안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위원회’를 이끌었던 김 위원장은 누구보다 갈등 조정의 그런 ‘위험’을 잘 아는 사람이다. 김 위원장은 "내가 노동자 측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조정위 구성 자체가 기업 측 의중에 따른 것 아니냐는 불신이 강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제발 판만은 깨지 말아달라고 싹싹 빌며 위기를 넘겨왔다"고 말했다.  
 
우선 '잘해봐야 본전'인데 왜 맡았는지가 궁금했다. 위원장직을 수락한 지난 7월은 그가 대법원장 후보로 거론되던 때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속절없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게 분명했죠. 백혈병 조정위 때 경험이 너무 강렬해 더 망설여졌습니다. 일주일 말미를 얻어 고민하던 차에 선물받은 책에서 ‘보라 한국의 법률가들, 그들은 사회의 변화와 개혁에 제대로 기여한 적이 없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지난달 28일에 진행한 2시간여의 인터뷰와 그 뒤 수 차례 가진 전화통화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 근본적 한계 아닌가.    
“유럽에서 공론화에 수십년이 걸렸다는 것은 탈원전 이슈가 제기된 뒤 정책이 엎치락뒤치락했던 총 기간을 의미한다. 공론조사 기간을 여기에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해외와 비교해도 조사 실행 기간으로 3개월은 짧지 않다. 다만 대립하는 양측의 의사를 조율해 조사의 ‘룰’을 정하는 준비 기간이 6개월 정도는 필요한데 그러지 못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게 아쉽다.”
 
공론화위는 ‘들러리’ ‘애물단지’라는 혹평이 계속됐다.      
“원전 건설 중단이 대통령 공약이어서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공론화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이해할 시간이 있었다면 쉽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본다. 공론조사는 다수의 힘에 의해 진행되는 정치적 의사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숙의(熟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진화된 형태다.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시민 대표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며 다수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다. 정부의 의지가 478명의 의사를 좌우할 수 없다.”
 
국회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것 같다.    
“16일 국정감사 증인으로 오라는 국회의 소환장을 받았다. 부담스럽지만 공론조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싶어 간다고 했다. 공론조사가 정치권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데서 출발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잘 활용하면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다수가 결정하고 소수가 격하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야기되는 투쟁의 방식에서 ‘숙의’의 방식으로 바꿔보자는 시도다. 이번 조사의 대상은 정부 정책이기 때문에 의회의 입법 사안과는 다른 영역이다.”    
지난달 20일 공론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지형 위원장. 김 위원장은 지난 7월 취임 직후 위원들과 지원단 공무원들에게 공론화위가 추구해야할 가치로 '중용' '개척자 정신' '통합'을 제시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20일 공론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지형 위원장. 김 위원장은 지난 7월 취임 직후 위원들과 지원단 공무원들에게 공론화위가 추구해야할 가치로 '중용' '개척자 정신' '통합'을 제시했다. [연합뉴스]

사법절차에도 배심제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는 게 김 위원장의 소신이다.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된 사법절차가 불복의 악순환을 막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공론조사 전도사’를 자임한 것도 같은 믿음 때문이다. 지난달 16일 시민참여단 오리엔테이션에서 김 위원장은 “여러분은 500인의 현자입니다.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없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통합과 상생의 길을 찾아주셔야 합니다”고 말했다. 
 
‘일반인 500명’에게 국가 중대사를 판단하라는 건 포퓰리즘이 아닌가.    
“대중 여론에 영합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라면 공론조사는 이와 다르다. 이해당사자들과 이들 편에 선 전문가들이 마치 배심재판의 원고와 피고처럼 배심원단(시민참여단)을 설득해 다수를 만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시민참여단은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학습하고 토론한다."
 
‘500인의 현자’가 길을 찾을 것이라고 믿나.
"미국의 배심제를 잘 보여준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 빗댄 표현이다. 계획적 살인 혐의가 짙은 피고인에 대해 유죄 심증이 깊은 11명의 다른 배심원을 주인공 헨리 폰다가 하나씩 설득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시민참여단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몽골은 최근 수도 울란바토르에 지하철을 건설할지를 두고 공론조사를 했다. 조사 전 찬성이 압도적이었지만 숙의 후 배심원단은 반대로 돌아섰다. 기후ㆍ인구 등을 고려할 때 경제성이 없다는 의견에 공감한 결과다.” 
 
배심재판에선 배심원단이 외부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된다. 478명을 그렇게 관리할 수 있나.
“처음부터 걱정했던 문제다. 참여단의 신원노출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참여단에게도 참여 사실을 알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설명했고 기자들과의 접촉도 막았다. 통상 일주일 안팎인 숙의 과정에 한 달을 배정하다 보니 '오염' 가능성이 커진 면이 있다. 숙의성과 오염 가능성 차단의 필요성이 충돌한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숙의성에 무게를 뒀다.”  
신고리 5,6호기 건설현장인 울산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은 8월 28일 현장을 방문한 김 위원장 등에게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송봉근 기자

신고리 5,6호기 건설현장인 울산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은 8월 28일 현장을 방문한 김 위원장 등에게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송봉근 기자

1971년 첫 상업용 원전 고리1호기 건설에 착공한 시점부터 46년 동안 한국의 정책 방향은 줄곧 ‘원전 확대’였다. ‘탈원전’이라는 말 자체에 익숙한 국민들도 많지 않다. 조사에서 유의미한 편차가 발생해도 ‘공론조사 따로 여론 따로’가 돼 갈등이 지속될 수 있다. 
 
참여단의 판단과 여론의 간극이 커지면 사회 갈등 예방이라는 목적 달성에는 한계가 있을 거 같다.
“맞다. 공론조사에 따른 정부의 결정을 국민들이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공론조사를 만든 제임스 피시킨의 모델에는 그런 고민이 없었지만 우리는 범국민적 숙의가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에 전국 순회 토론회, TV토론회 등을 병행했다.” 
 
갈등의 현장에선 어떤 가치들이 충돌하고 있다고 느꼈나.    
“생명권과 생존권의 대립이다. 경주 지진을 경험한 부산ㆍ울산ㆍ경남의 주민들은 지진 발생 가능성과 원전의 위험이 결합해 생명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공사 중단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는 이해 당사자들은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다. 양측의 절박함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공론조사가 단순히 정책 판단 과정에 그치지 않고 갈등 조정 기능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박한 사람들이 ‘배심원’을 설득할 기회를 얻었다고 만족하겠나.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데.  
“배심재판에서 원고ㆍ피고가 평결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참여단의 판단을 이해당사자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섬세함이 필요하다. 공론조사의 결과가 새로운 갈등의 재생산이라면 공론조사 무용론이 제기될 것이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안까지 권고안에 넣으려 한다." 
 
공론조사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는 일부 이해당사자들은 결국 법원의 판단을 구할 가능성이 크다. 법관의 가치 판단과 시민참여단의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법적 분쟁을 예방하는 게 목표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 공사가 재개되는 경우보다는 공사가 중단되는 경우에 소송 제기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본다. 공론조사가 정책을 철회할 만한 근거가 되는 ‘중대한 사정변경’에 해당되는지가 재판의 쟁점이 될 것 같다." 
 
김 위원장은 인터뷰에서 “공론조사의 1차적 목표는 공론조사를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는 “공론조사는 우리 사회가 정책을 둘러싼 극한 대립과 투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토론과 통합의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번 조사가 국민들에게 공론조사의 유효성을 인식시키는 선례로 남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ㆍ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김지형 공론화위원장은
1989년 법관 연수차 머무르던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노동법 연구를 시작해 자타가 공인하는 노동법 전문가가 됐다. 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의 제청과 노무현 대통령의 임명으로 최연소 대법관이 됐다. 재임 기간 중 주요 사건에서 진보적 성향의 소수의견을 내 김영란ㆍ박시환ㆍ이홍훈ㆍ전수안 전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렸다. 2012년 법무법인 지평에 합류한 그는 같은 해부터 진보성향의 변호사·교수 등으로 구성된 노동법연구소 ‘해밀’의 소장을 맡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위원장(2014년 10월~2016년 1월),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원장(2016년 6월~7월) 등으로 갈등 조정에 기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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