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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책임론’프레임에 갇혀 비난과 매도 일색… 대한제국은 결코 무능하거나 자멸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7> 선포일 기념 전문가 토론
대한제국 창건 120주년을 맞아 ‘왜곡된 대한제국, 부활하는 대한제국’을 주제로 세 전문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김경빈 기자

대한제국 창건 120주년을 맞아 ‘왜곡된 대한제국, 부활하는 대한제국’을 주제로 세 전문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김경빈 기자

120주년을 맞는 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 선포일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토론회가 지난달 27일 3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중앙일보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가 ‘왜곡된 대한제국, 부활하는 대한제국’을 주제로 대담했다.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지난 120년 동안 ‘폄하 일색’이었다. 이날 토론은 대한제국에 덧씌워진 왜곡과 오해를 바로잡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대한제국의 의미를 새롭게 재평가하는 이 같은 토론이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것도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궁우와 환구단. 1911년 일제의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에 실려 있다. 2년 후인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다. 오른쪽의 둥근 지붕 건물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황제 즉위식을 열었던 환구단이다. 지금은 위패를 모시던 황궁우만이 고층 빌딩 숲속에 외롭게 서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궁우와 환구단. 1911년 일제의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풍속풍경사진첩’에 실려 있다. 2년 후인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다. 오른쪽의 둥근 지붕 건물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황제 즉위식을 열었던 환구단이다. 지금은 위패를 모시던 황궁우만이 고층 빌딩 숲속에 외롭게 서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120주년,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서영희=지금까지 대한제국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비아냥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무슨 황제냐’는 식이었죠.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일 병합사’ 서술에서부터 비롯된 ‘망국책임론’ 프레임이 오늘날의 우리 교과서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은 구래의 조선왕조적 질서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던 과도기입니다. 최근의 ‘건국절 논란’에 대한 해답도 한국 근대국가의 기원으로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 규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황태연=중국이 12세기에 이미 보편적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세계 학계에서 거의 합의를 보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근대성의 기준으로 간주하는 요소가 뭔가요? 신분해방과 평등, 정치적 자유, 정치와 종교의 분리, 관료행정, 공무원 임용시험, 만민교육제도, 자유시장과 산업화, 종교적·사상적 관용, 혁명 개념, 제지·인쇄술의 발달에 기초한 문화·예술의 대중화 등인데 이런 것들이 극동 지역에서 이미 일찍부터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극동의 근대적 요소가 극서 지역으로 전해져 17~18세기 서양 계몽주의와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법치주의와 대의제도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11개 극서 국가만큼 높은 수준의 근대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렇지 낮은 수준의 근대화는 극동 지역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이른 시기에 시작됐습니다. 우리의 근대화도 대한제국이나 조선 후기부터 시점을 잡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보다 더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극동 유교문명권에서 ‘근대화’란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변혁’이 아니라 ‘낮은 근대에서 높은 근대로의 도약’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근대화의 DNA가 내장돼 있기 때문에 19세기 서양의 영향을 받으며 다시 빠른 속도로 극동 지역에서 높은 수준의 근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도 10년 정도 사이에 대단히 높은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는 대한제국이 ‘미개한’ ‘야만’의 나라라는 전제 아래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정당화를 위해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능의 대명사’로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일본의 침략주의는 대한제국이 국가나 황제 차원에서 진행한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대한제국에 대한 비난과 매도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종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광무개혁)이 상당한 성과를 내자 이를 방치할 경우 한반도 장악이란 그들의 오랜 꿈이 무산되고 말 것이란 의구심에서 일제는 서둘러 대한제국을 강제로 침탈했던 것입니다. 대한제국은 결코 무능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재평가-망국책임론을 넘어서
황태연=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항일투쟁을 위한 비상국가였지만 경제를 비롯한 근대화 개혁도 결코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각종 통계가 그런 점을 보여줍니다. 오랜 세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경제통계의 책임을 맡았던 앵거스 매디슨의 2012년 한·중·일 각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 통계를 보면, 대한제국기 전반에 걸쳐 경제가 고속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은 182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 600달러로서 중국과 공동으로 동아시아 3위 국가였습니다. 1870년 이전에 저점을 통과해 1870년 604달러로 반등하기 시작했고, 이후 40년 동안 연평균 약 5.3달러씩 매년 고도성장을 거듭해 1911년에는 국민소득 815달러에 달해 중국(1913년 552달러)과 인도(1911년 691달러)를 제치고 일본(1911년 1356달러)·필리핀(911달러)·인도네시아(839달러)에 이어 아시아 4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매디슨의 이 통계는 1900~1901년부터 개시된 실질임금 상승추세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서영희=대한제국은 황제정을 통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으로 근대적인 민족 정체성 형성의 맹아를 마련하였고, 물적·인적 자원의 측면에서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한제국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편협한 민족주의라고 공격하지만, 대한제국기에 광무양전지계사업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사업이 그 토대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고, 대한제국기에 세워진 각종 근대식 학교에서 배출된 인력들이 일제 총독부 관료체제로 흡수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제국기 광무개혁이 이룩한 근대화의 성과를 일제가 강탈한 것이라는 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식민지 지배체제의 효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한제국을 암흑시대로 만들어 근대와 단절시키는 것은 정당한 역사 인식이 아닙니다.
 
이태진=저는 원래 조선시대의 정치사·사회사를 전공했습니다. 근대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무렵입니다. 서울대 규장각도서관리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였죠. 임기 마지막 연도인 92년에 규장각 장서 속에 포함된 대한제국 시기 정부 문서들을 영인해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하다 고종·순종 두 황제의 명령서인 조칙(詔勅), 칙령(勅令) 묶음에서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위조된 문건 수십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문건은 일본의 통감부가 ‘정미조약’(1907)을 강제하면서 제정한 법령들인데 최종 결재 과정에서 황제 서명을 위조해 처리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시기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사 전반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도 대한제국 연구를 새롭게 시작했는데 한 교수나 저처럼 조선시대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생각은 ‘조선이 그렇게 쉽게 망할 나라는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시기부터 연구를 시작한 이들은 대체로 1875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에서 출발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예 패망 과정만을 보는 것이 되고, 그러다 보면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통설에 대한 의심이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역사적 과제
대한제국 정전이었던 중층의 중화전. 1904년 대화재로 사라지기 이전 모습이다. 중화전 뒤로 고종이 각국 공사를 만났던 서양식 건물인 구성헌이 보인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정전이었던 중층의 중화전. 1904년 대화재로 사라지기 이전 모습이다. 중화전 뒤로 고종이 각국 공사를 만났던 서양식 건물인 구성헌이 보인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서영희=2000년대 이후 대한제국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었음에도 저의 박사 논문 이후에 대한제국 정치사를 다룬 새로운 박사 논문이 별로 안 나오고 있는 점은 아쉬운 일입니다. 기존의 프레임을 극복하는 게 참 쉽지 않구나 하는 점을 실감합니다. 또 역사 교과서에는 여전히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을 대등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독립협회는 하나의 단체이고 대한제국은 국가인데 이 둘을 대등하게 병치시켜 서술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런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대한제국 재평가는 힘듭니다. 엄연한 현실로서 존재했던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제정을 평가해야 합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실패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일 뿐입니다. 대한제국 선포에는 단순히 황제국을 선포했다는 것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근대 주권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대등하게 활동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제국 선포를 추진한 각계각층의 상소문과 여론을 보면 칭제를 통해 국격을 높임으로써 자주독립과 자강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개화파,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역사 교과서 서술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황태연=대한제국은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하나는 동서 격차를 극복해야 하고, 또 하나는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해야 했고, 세 번째는 낮은 근대에서 높은 근대로 가는 과제입니다. 이 중에 반제국주의 투쟁만을 강조하면 위정척사파가 되고, 근대화만을 강조하면 친일 개화파가 됩니다.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가려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근대화도 이뤄냈던 대한제국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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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國’을 지향했던 대한제국
이태진=고종은 정조를 가장 훌륭한 분으로 꼽으면서 정조가 18세기에 제시한 ‘민국(民國)’ 이념을 중시하며 자신이 그것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5년 2월에 고종이 내린 교육 조서를 보면 나라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국민 교육’이 필수라는 말을 합니다. 교육의 내용은 덕양, 체양, 지양의 순서로 ‘삼양 교육’을 제시했습니다. 대한제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은 이를 일본 왕의 교육칙어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선 분량을 봐도 일본의 교육칙어보다 3배나 됩니다. 내용을 비교해도 일본의 교육칙어는 신민 의식 함양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게 없습니다. 이 교육조서는 내용적으로 19세기 미국의 교육이념과 흡사하여 흥미롭습니다. 미국에서는 당시 존 로크의 교육론이 크게 활용되는데 그때 미국에선 체양, 덕양, 지양의 순서였습니다. 고종이 1909년 3월에 내린 다른 한 조서에서도 국민을 강조합니다. 교육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고 그런 과정을 통해 국민이 탄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나라는 민이 쌓여서 되는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대한제국은 형식상으로는 황제국이었지만 내용상으론 민국을 지향했던 것입니다.
 
서영희=고종이 발탁한 이들은 대개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이 실권을 잡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정통 양반세력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개화 지식인들이 조롱하고 비아냥대고 했지요. 1880년대부터 신분제는 사실상 폐기되고 있습니다. 소위 갑오개혁(1894) 훨씬 이전인 1886년에 노비세습을 폐지하는 법령이 반포됩니다. 고종은 그때부터 이미 서얼이건 천민이건 간에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해서 썼습니다. 그런 과정에 근대적 교육기관도 많이 설립되었죠. 대한제국기에는 상공학교, 무관학교, 각종 외국어학교 등 근대적이고 실용적인 학교가 계속 설립되었고 거기에서 근대화를 추진할 신엘리트, 즉 ‘광무 세대(generation)’가 형성됩니다.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덕수궁) 궁내부에 포진한 이 신흥 관료들의 역할도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황태연=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잡혀 있는 근대국가의 모델은 민주공화국과 인민공화국뿐입니다. 그 모델 속에서 대한제국을 봉건왕조로 보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에도 서양의 많은 나라가 왕을 모시고 있는데 모두 다 국민국가이고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영국·스페인 등 소위 선진국들이 그렇습니다. 왕이나 황제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못하거나 근대화를 못하거나 국민국가를 못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태진=황제정이기 때문에 봉건국가라고 인식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거예요. 근대국가를 만들어가기 위해선 권력집중이 있어야 하죠. 선진국들도 다 거쳤죠. 제가 대학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의할 때 일본에서 온 친구가 강의를 들으면서 자기는 다른 학자들이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대한제국 황제정을 봉건국가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웃음)
 
중립국 선언과 외교
서영희=원래 중국이 『조선책략』을 통해 조선에 제시한 것은 ‘러시아를 막으라’는 것이었죠. 미국을 끌어들여서라도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권고했었습니다. 『조선책략』이 조선에 들어온 게 1880년이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5년도 안 된 시점에 고종이 추진한 것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명성황후의 아이디어였다고 하면서 고종이 ‘수원책(綏遠策)’이라고 명명했어요. 먼 나라를 끌어들여 가까운 나라를 견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도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외교정책과 맥을 같이합니다.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은 가장 이상적으로는 중립국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일본을 견제해 주길 바라며 러시아에 군사동맹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해 생각하는 게 우리가 러시아에 기대하는 것만 못했습니다. 대한제국을 일본과의 만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하나의 협상 카드로 생각했던 것이죠. 미국에도 중재를 부탁했지만 미국은 나중에 결국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으로 오히려 일본의 손을 들어준 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스스로 추진한 게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21일에 나온 ‘전시 중립선언’입니다.
 
황태연=어느 나라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안보 조건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권위로운 국론통일 기제’ ‘첨단 무력’ ‘적절한 동맹’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나라라서 동맹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미국 같은 초강대국도 전 세계에서 동맹을 추구합니다. 대한제국은 황제정을 선포해 권위로운 국론통일 기제가 우선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3만 명의 병력을 기반으로 첨단 무력도 갖춰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적절한 동맹’이 문제였는데 영국은 일본 편에 서고 미국은 형식적으론 아무 편도 안 드는 상황에서 당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수퍼파워가 러시아였죠. 그러니까 고종의 당시 인아거일(引俄拒日) 구상이 틀린 건 아니었죠.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 사정으로 붕괴되면서 1903년 무렵부터 일본과 곳곳에서 충돌하지만 제대로 싸움도 못하게 되죠. 그때 고종이 국가 안보를 염려해 중립국 선언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이 같은 외교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태진=제가 대한제국의 중립국 문제를 최근에 다시 정리해 봤어요. 대한제국 선포 전후 군주가 이용익을 시켜 차관 도입을 추진하면서 거의 동시에 중립국 승인외교가 진행됩니다. 차관 도입과 중립국 승인이 맞물려 가는 것입니다. 1차 대상은 러시아예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참석한 민영환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차관 도입이었어요.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 부설 사업으로 재정난에 빠져 프랑스를 대신 소개합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방해공작이 시작됩니다. 곧 벨기에 기업가들과도 접촉하게 되는데 1901년 중립국인 벨기에와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다음에 또 하나의 중립국인 덴마크와도 조약을 체결합니다. 유럽의 강소국으로 중립국인 나라들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죠. 1901년 8월부터 가쓰라 내각으로 바뀐 일본은 영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올인하는데 그 결과가 1902년 1월 30일의 ‘영·일 동맹’이에요. 사실은 영·일 협정(agreement)인데 일본이 영·일 동맹으로 과장을 했죠. 그 내용을 보면 상업적·공업적 이익에 대한 상호 보장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어느 모로 봐도 대한제국의 그동안의 차관 도입과 중립국 승인외교를 차단하기 위한 거예요. 일본의 갖은 방해공작을 타개하기 위해 고종은 국제적십자사와 헤이그 만국평화회원국에 가입합니다. 이것이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1919년 세워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하는 국권회복운동을 진행하는 것도 같은 노력의 연장선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토적으로는 나라를 빼앗겼지만 주권 전체에서 보면 계속 이어진 싸움이었기에 저는 망국은 없었다고 봅니다. 투쟁은 계속되었던 겁니다.
 
황태연=민비(명성황후)가 죽어서 대한제국이 섰고 고종이 죽어서 대한제국임시정부가 섰습니다. 책임론 관점에서 보아도 그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격동을 가지고 왔고 그렇게 공고화된 신존왕주의(新尊王主義)는 대외적으로 독립을 지키고 대내적으로는 개혁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 되는 과정은 대한제국의 부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태진=아까 이야기를 미처 못했는데 1902년에 고종 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서 칭경예식을 국제 이벤트로 구상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차관외교와 중립국 승인외교를 서두른 것도 이 행사에 맞추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거의 시기를 같이해 서울도시 개조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칭경예식에 초청한 외국 특사들에게 동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제국도 중립국을 인정받을 만한 문명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죠. 서울시내 거리에 전등불이 켜지고 전화가 개설된 것을 보게 하여 중립국 승인의 전기를 얻으려 한 것이지요.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평화운동도 시작되었습니다. 1900년에 철광왕 앤드루 카네기가 평화기금으로 거액을 내놓고 이듬해 노벨 평화상 시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헤이그 1차 평화회의, 2차 평화회의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종의 외교정책은 그렇게 국제평화운동의 흐름을 활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일본이 소위 ‘동양평화론’을 내세우며 영국·미국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거죠. 그것은 거짓 평화론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일본이 러시아와 대결해 준다는 것에 영국과 미국이 걸려들어 결국은 러시아·벨기에·프랑스 등을 배경으로 하는 대한제국 외교정책도 실패하게 된 거죠.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일본 정부의 동양평화론의 허구는 우리가 앞으로 계속 비판해 국제사회가 바른 인식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대상입니다.
 
연구할 가치의 보고
서영희=대한제국에는 재평가돼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그런 연구가 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망국책임론은 설 자리가 없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대한제국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단계가 정당하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건국절 논란 같은 것도 대한제국을 아예 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당연히 근대국가의 기원인 대한제국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딱 잘라서 1919년이냐, 1948년이냐 마치 양자택일 중 하나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건국절 논란 자체가 사실 난센스입니다.
 
황태연=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세상 물정에 취약했다’는 악평도 있습니다. 사실 정반대의 상황이었죠. 위기상황에서 모든 정보와 지식이 최고 권력자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정치학에서는 상식이거든요. 그들이 가장 잘, 가장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죽임을 당한 겁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으면 절대 그분들을 죽일 일이 없어요. 대한제국을 역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는 길입니다. 만약 대한제국을 폄하한다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거예요. 저는 통일이 되더라도 대한민국 국호는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의 ‘대’자는 처음부터 삼국을 다 포함하는 통일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바꿀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진행·정리=배영대 문화선임기자, 김도연 인턴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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