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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보이 제국의 황제, 휴 헤프너 별세

‘플레이보이’ 제국의 황제 휴 헤프너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CNN 등 미국 언론은 28일(현지시간)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를 인용, “헤프너가 자택인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의 아들인 쿠퍼는 “아버지는 미디어와 문화 개척자로서 특별하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며 “언론의 자유, 시민의 권리, 성적인 자유를 옹호하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문화 운동을 이끌어왔다”고 밝혔다.  
2006년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촬영된 휴 헤프너.[AP=연합뉴스]

2006년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촬영된 휴 헤프너.[AP=연합뉴스]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성차별 시대의 유물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자신보다 수십 살 어린 여성들과 천방치축 뛰어놀면서 리얼리티TV쇼에 등장한 말년의 모습이 오해를 부풀린 측면이 있다. 
그가 섹스와 불가분의 관계인 건 사실이지만, 그는 전설이라고 평가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토끼 모양의 로고를 창조해 나이키·코카콜라 등 대기업 브랜드에 맞먹는 가치를 창출했고, 새로운 잡지 문화를 열었다.  
헤프너는 시장을 꿰뚫은 사업가였고, 시대를 선도한 문화 아이콘이었다. 
1977년의 휴 헤프너. 60~70년대는 플레이보이의 전성기였다. [AP=연합뉴스]

1977년의 휴 헤프너. 60~70년대는 플레이보이의 전성기였다. [AP=연합뉴스]

플레이보이 클럽의 웨이트리스인 '바니걸'과 함께한 휴 헤프너. [AP=연합뉴스]

플레이보이 클럽의 웨이트리스인 '바니걸'과 함께한 휴 헤프너. [AP=연합뉴스]

그는 1926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 어머니는 교사였다. 네브래스카 출신인 부모는 보수적인 기독교도였다. 2011년 헐리우드리포트 인터뷰에서 헤프너는 “부모님은 높은 도덕 기준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를 억제했다”며 “집 안에서도 포옹하거나 키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 복무와 대학을 마친 뒤 그는 에스콰이어 잡지에서 일하며 남성 잡지 창간을 기획했다. 중산층 고학력 남성의 욕망을 정확히 반영한 잡지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그는 여성 모델의 누드 사진을 심층 기사와 인터뷰, 유명 작가의 소설과 함께 실었다. 과거 CNN 인터뷰에서 그는 “세련되고 교양있으면서, 남성의 시각에서 남녀의 로맨틱한 관계에 집중하는 남성 잡지를 내가 읽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53년 12월 발간된 플레이보이 창간호. [중앙포토]

1953년 12월 발간된 플레이보이 창간호. [중앙포토]

창간호 발행은 1953년 12월. 표지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가 장식했다. 수준 높은 글과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을 양 날개 삼은 잡지는 순항했다. 실패를 우려해 창간호에 발행 날짜를 표시하지도 않았지만, 잡지는 바로 5만 부를 인쇄할 정도로 성공했다. 
서구 사회에 몰아친 ‘성(性) 혁명’과 함께 60~70년대 그의 사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유명세도 치렀다.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63년 공공외설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플레이보이는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섹스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뿐이다”라고 말했던 그는 재판 결과를 입증이라도 하듯, 컨텐트의 수준을 높이는 데 힘썼다. 존 업다이크, 이언 플레밍,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과 마틴 루터 킹, 존 레논, 지미 카터 등 저명 인사의 인터뷰가 플레이보이에 실렸다.
2007년 휴 헤프너가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플레이보이 잡지를 들고 있다.[AP=연합뉴스]

2007년 휴 헤프너가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플레이보이 잡지를 들고 있다.[AP=연합뉴스]

브랜드도 확장했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등 TV쇼를 진행했고, 토끼 복장을 한 ‘바니 걸’이 서비스하는 플레이보이 클럽을 전국에 열었다. 
71년엔 로스앤젤레스 대저택에 ‘플레이보이맨션’을 마련해 유명인사들과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잡지 발행 부수가 700만에 이르던 최고의 황금기였다.  
 
80년대 들어 쇠락이 시작됐다. 펜트하우스·허슬러 같은 성인잡지로 독자들이 빠져나갔다. 뇌졸중을 앓은 뒤엔 경영의 상당 부분을 딸에게 넘겼다. 
21세기는 더욱 혹독했다. 값싸고 자극적인 포르노를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플레이보이를 찾지 않았다. 
위기에 몰린 2015년 플레이보이는 누드 사진을 더 이상 싣지 않겠다는 대변혁을 선언했지만 발행부수는 80만까지 떨어졌다. 
1999년 플레이메이트들과 함께한 휴 헤프너[AP=연합뉴스]

1999년 플레이메이트들과 함께한 휴 헤프너[AP=연합뉴스]

60살 연하인 세번째 부인 크리스탈 해리스와 함께한 휴 헤프너. [EPA=연합뉴스]

60살 연하인 세번째 부인 크리스탈 해리스와 함께한 휴 헤프너. [EPA=연합뉴스]

사업은 어려워졌지만, 헤프너는 건재했다. 2005년부터 플레이보이 맨션에 동거 중인 여성들과 리얼리티 TV쇼에 출연해 사생활을 공개하는가 하면, 2012년엔 세 번째로 결혼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헤프너는 86세, 부인인 크리스탈 해리스는 60세 연하인 26세였다. 
그는 2013년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 “같이 잔 여성이 분명히 1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결혼했을 땐 절대 바람을 피지 않았으며, 결혼하지 않았을 때 충분히 여자를 만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2001년 CNN 인터뷰에서 “사회적·성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꾼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 그거면 충분히 행복하다”며 “나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려고 하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하던 평가를 받았다. 
2008년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휴 헤프너:플레이보이, 운동가, 반역자’에서 록그룹 키스의 리더인 진 시몬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몇이든 아무 남자나 내 앞에 데려와 봐라. 그 남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휴 헤프너처럼 살고 싶어할 거다”
 
그는 생전에 마릴린 먼로 옆에 영면하는 것을 “무척 시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람대로 미리 마련해둔 먼로 옆의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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