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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6) 병든 부친 변까지 입에 댔던 조선 선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에 있는 최흥원 선생의 종택인 ‘백불고택’. [사진 송의호]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에 있는 최흥원 선생의 종택인 ‘백불고택’. [사진 송의호]

 
선비의 서재를 정리하면 의서와 약 처방 관련 책을 흔히 만나게 된다. 무슨 관계일까.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 시대 후기까지도 보통 사람은 의원 등 의료를 이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누구든 자신이나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 처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선비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선비의 기본 덕목인 효행 실천에서 부모를 편히 모시는데 의학이 절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는 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인 옻골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배출한 대표 인물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이다. 그는 효행이 지극해 나라에서 효자 정려각이 내려졌다. 마을 가운데 지금도 태극 문양이 선명한 정려각이 서 있다.  
 
이질 고치려고 여색 멀리해  
 
백불고택 옆에 마련된 백불암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뒤로 팔공산 능선이 보인다. [사진 송의호]

백불고택 옆에 마련된 백불암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뒤로 팔공산 능선이 보인다. [사진 송의호]

 
최흥원은 젊었을 때 이질이 심했다. 의원은 십년 동안 여색을 끊지 않으면 병을 고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때부터 그는 별처에서 몸을 조심해 약을 먹지 않고 나았다고 한다.
 
행장(行狀)에는 백불암이 일찍이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은 의약을 알지 않을 수 없다”며 “의서를 연구했다”고 쓰여 있다. 그의 수준은 “장부 근맥(오장육부와 근육,혈맥)의 연결과 약의 성질을 통달했다”고 할 정도다.  
‘백불암선생문집’의 책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백불암선생문집’의 책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1735년 최흥원은 아버지가 몇 달 동안 병석에 들자 정성을 다해 약을 달이고 상분(嘗糞, 변을 맛봄)했으나 돌아가셨다. 변을 입에 대야 했다니 효도는 이렇게 어려웠다.  
 
5년 뒤엔 부인 손씨가 세상을 떠난다. 36세 선비 최흥원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40여 년을 보냈다. 첩도 두지 않았다. 그로부터 23년 뒤에는 하나뿐인 아들 주진이 요절한다. 상심이 컷을 것이다.  
 
백불암 최흥원은 한 집안의 효자는 물론 부인동 전체의 노인과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대효(大孝)를 실천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진은 백불암이 공전(公田)을 마련해 세금과 부역을 충당한 강령을 적은 ‘선공고절목’.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백불암 최흥원은 한 집안의 효자는 물론 부인동 전체의 노인과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대효(大孝)를 실천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진은 백불암이 공전(公田)을 마련해 세금과 부역을 충당한 강령을 적은 ‘선공고절목’.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어머니는 90세에 들어 노환이 심해졌다. 최흥원은 밤낮으로 손수 음식과 약을 챙겼다. 약 시간을 일정하게 지켰고 반드시 손을 씻었다. 또 노모가 오래 설사에 시달리자 방안에 변기를 설치해 나무 통으로 변을 받고 보자기와 걸레 등을 새 것으로 바꾸었다. 주무시면 숨소리를 살폈다. 이러기를 3∼4년.  
 
모친상을 당한 뒤엔 묘 아래에 움막을 엮고 삼년상을 마쳤다. 백불암의 서가에선 『방약합편(方藥合編)』이란 책이 발견됐다. 책장을 넘기면 곳곳에 붓으로 촘촘이 쓴 처방 메모 등이 나온다. 그는 성리학만큼 의약에도 밝은 선비였다. 조선 시대 효자는 반쯤은 의사‧약사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부모의 몸 상태를 알고 스스로 건강해야 은퇴 이후에도 사람 구실을 할 것이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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