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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비정한 졸부 사회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인류사의 대부분에 걸쳐 공동체적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우선되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계몽시대 이후 인간의 진로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부분의 문명국 헌법은 생명, 의사 표현, 재산, 거주 이전, 집회 결사, 사생활 보호, 행복 추구의 권리 등을 명시하고, 우리의 헌법도 거의 20여 개의 개인 권리를 명시한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의식은 점차 강화돼 업무시간 이외에 업무지시를 받지 않을 권리, 인터넷상에서 잊힐 권리 등으로 범위를 확대해 가고 있다.
 
권리는 개인의 존엄과 관계돼 있어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개인의 권리 주장과 공동체 의식의 조화다. 나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사회적 약자가 소외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온기를 유지해야 한다. 동등한 권리 주장을 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회적인 약자가 개인들의 권리 주장 속에서 비정하게 소외된다면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약탈사회로 회귀하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의 시선을 끈 두 사건, 서울의 특수학교 건립을 둘러싼 분쟁과 부산의 여중생 폭력 사건이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지역에 세워질 때 집값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주민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국회의원은 주민 표를 의식해 학교 부지를 다른 목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제안을 해 문제를 더 풀기 어렵게 만든다. 장애인의 부모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며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학교 건립에 동의해 달라고 비는 동안 일부 주민은 상처 받은 장애인 부모들에게 쇼하지 말라고 비난한다. 여론이 비등하자 눈치를 살피던 교육청이 뒤늦게 특수학교 건립에 양보는 없다며 나선다. 아이들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의 단체인 교총·전교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부산에서는 14세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한 살 아래의 여학생을 잔혹하게 구타한다. 늘상 그렇듯이 한 사건이 불거지자 도처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보고된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청소년 사이에서 무너져 가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 국민 10명 중 9명이 청소년 잔혹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여론조사에 답하고, 청소년의 계도와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답은 8.6%에 머문다. 여론에 편승한 국회의원은 청소년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한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는 처벌 논의에 묻힌다. 생육을 책임진 부모가 자식의 그릇된 행동에 자신을 탓하며 애통해하는 모습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갇힌 채 사회적 차원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참으로 볼품없는, 근본 없는 사회의 모습이다. 경제적 통계가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동안,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따라오지 못하고 오히려 상생보다 적자생존에 매몰된 야만의 상태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물줄기를 되돌리기 위해 먼저 정신적으로 피폐한 우리의 현주소를 인정하자. 주머니는 조금 두툼해졌지만 타인은 물론 약자에게조차 인색한 품위 없는 졸부의 수준에 우리가 머물러 있음을 인정하자. 그리고 돈 이야기, 정치 이야기 하는 시간의 일부라도 떼어 내어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런 그림이 있어야 어떤 인재를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복지를 위해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그림도 나올 수 있다. 합의된 그림이 없으니 갈등은 증폭되고 적자생존의 척박한 문화가 횡행한다.
 
2200년의 세월을 뚫고 키케로의 말이 우리 귓전을 울린다. “인간사회와 공동체는 그 구성원 각자가 가장 친밀하게 결합돼 서로 최대의 호의를 베풀 때 가장 잘 유지 보존될 것이다. ···의사를 전달하고 토론하며 판단하는 것을 통해 인간 상호 간의 결합은 돈독해지고 자연발생적 형제애와 같은 사회정신이 함양된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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