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J report] 고장난 ‘필립스 곡선’ … 실업률 떨어져도 임금 안 오른다

1958년 영국의 경제학술지 ‘이코노미카(Economica)’에 런던 정경대(LSE) 신임 교수 올번 윌리엄 필립스의 논문이 실렸다. ‘1861~1957년 영국의 실업률과 명목임금 변화율’을 분석해 명목임금 상승률과 실업률이 역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힌 이 논문은 경제학의 새 장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물가와 실업은 경제 정책 담당자가 고민하는 주요 화두다. 어떤 정부도 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힘들다. 둘 사이의 적정한 균형점을 찾아야 했다. 필립스의 논문은 이 고민을 풀 실마리를 제공했다.
 
필립스의 논문은 실업률과 물가의 상관관계를 직접 밝혀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명목 임금의 상승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실업률과 물가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 사이에 분명한 역의 관계가 성립된다면 필립스 곡선 위에 있는 한 조합을 선택해 원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펼칠 수 있다.
 
비록 70년대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은 통화와 재정 정책 결정의 매뉴얼이 됐다. 완전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중앙은행이 필립스 곡선을 늘 챙긴 이유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의 주요 페이지를 차지한 필립스 곡선의 생명력이 다한 것 같아서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유로존·일본 등 주요국의 실업률이 떨어졌으나 물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과 유로존의 실업률은 2011~2013년 각각 8.1%와 11.2%였지만 올 상반기에는 4.6%와 9.5%(1분기)로 하락했다. 미국의 7월과 8월 실업률은 4.3%와 4.4%로 더 떨어졌다. 완전 고용(5%)에 가까운 수치다.
 
실업률이 큰 폭으로 떨어졌지만 물가는 요지부동이다. 미국의 7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7% 오르는 데 그쳤다. Fed의 목표치(2%)에 못 미친다. 유럽의 상황도 비슷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6월 올해 인플레이션 전망을 기존의 1.7%에서 1.5%로 낮춰 잡았다.
 
필립스 곡선의 메커니즘이 고장난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10일 한국은행 해외경제포커스에 실린 ‘최근 주요국 임금상승세 부진 원인 및 평가’에 따르면 OECD 국가의 실업률은 2011~2013년 7.9%에서 지난해 6.3%로 하락했지만 명목임금 상승률은 금융위기 직후부터 2%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대규모 통화 완화와 재정 부양, 구조개혁 등 아베노믹스를 펼치는 일본의 성과도 미미하다. 올 상반기 일본의 명목임금 상승률은 0.4%에 불과했다. 7월 임금 상승률은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0.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률 하락 속도보다 임금 상승이 더딘 이유는 우선 투자 위축 등으로 노동생산성 증가세가 둔화한 데 원인이 있다. 세계금융위기 이전인 2003~2006년 3.2%이던 주요 7개국(G7)의 고정투자 증가율이 2013~2015년에는 2.4%로 감소하며 지난해 4분기 노동생산성은 1995년 1분기의 90%에 그쳤다. 노동생산성 증가세가 둔화하며 기업이 임금을 올려줄 여력이 없어진 것이다.
 
가계와 기업 등의 인플레이션 기대 약화도 물가 상승을 가로막는 원인이다. 한국은행은 “미국과 유로지역의 기대인플레이션율이 2014년 이후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2016년에는 물가 목표인 2% 수준을 밑돌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기대가 임금 상승과 그에 따른 소비 증가·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순환구조가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향후 어려울 때를 대비해 지갑을 열지 않는 기업과 근로자의 태도도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BOJ) 총재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기업과 노동계가 물가 상승을 막는 디플레이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고령층의 노동 참여가 늘어나며 임금 상승률을 끌어내린 것도 필립스 곡선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로 꼽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55세 이상의 고령층의 고용 비중이 늘고 있다. 2007년 한국의 고령층 고용 비중은 18%였지만 지난해에는 25.6%로 커졌다. 미국은 2007년 17.6%에서 지난해 22.7%로 증가했다.
 
고령층이 저임금 노동 시장으로 진입하며 전체 임금 수준은 하락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고령화로 인한 임금상승률 하락폭은 2013~2016년 연평균 0.13%포인트인 것으로 추정됐다.
 
노동계의 영향력 약화도 필립스 곡선이 힘을 잃는 이유로 꼽혔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미국 기업의 경우 노사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회사가 거둬들인 과실 중 사측의 몫이 커진 탓에 임금 상승률이 둔화하고 물가도 제자리걸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필립스 곡선이 고장 나면서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스텝도 꼬이기 시작했다. 대규모 통화완화 정책으로 풀린 돈을 거둬들일 시기를 저울질하는 중앙은행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물가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경기회복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딘 임금 상승은 통화 정책 기조 변경을 검토할 때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CNBC는 “물가와 실업률이라는 두 기둥에 통화정책을 고정한 중앙은행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돈을 시중에 쏟아부었고 목표는 이뤘지만 물가를 끌어올리지 못했다”며 “(부양책이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