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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숙의 Q] 시인 고은, ‘길’에서 만난 운명

"영광(榮光)에 대한 자세에는 천진난만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다섯 살 아이의 어떤 기쁨을 느끼고 있다. 나의 시는 첩첩이 고난을 견뎌온 한국어 속에서 태어났고 한국어는 거의 기적처럼 연면(連綿)이 이어와서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주어(主語)가 곧잘 지워져도 무방한 한국어 속에 자주 숨거나 지워진 1인칭 화자(話者)로서 살아온 시의 세월 60년을 채우고 있다. 이제 시가 귀신의 일인지 허공의 일인지를 터득할 만 하더라도 도리어 시를 정의하는 나 자신은 어디에도 없다. 시인이 되면 될수록 시인은 자신의 뒷모습을 모르는 것처럼 시를 모르게 된다. 다만 나에게는 노래하는 자와 노래를 듣는 자의 실재(實在) 사이에서 영혼의 대칭(對稱)이 이루어지는 체험이 있다”


올해 2월 이탈리아 로마 아드리아노 신전에서 로마재단 '국제시인상' 시상식이 열렸다. 고은은 아시아 시인으로는 최초 수상자가 됐다. 그의 기념강연에는 시인으로서의 철학이 함축돼 있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모르는 것처럼 아직 시를 모르겠다는 고은 시인을 서울 장충동에서 만났다.
 
‘배양숙의 Q’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최정동 기자

‘배양숙의 Q’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최정동 기자

 

언제 시를 처음 접하셨나요?
“1947년, 해방 직후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한국어 교과서를 받았습니다. 국어 교과서에 이육사의 ‘광야’라는 시가 실려있었어요. 그때 ‘시’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지요. 제게 ‘광야’는 생전 처음 보는 세계였습니다. 저는 집, 마당, 학교, 마을, 이런 장소만 알았지 광야라는 공간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도저히 제 발이 다가갈 수 없는 새로운 세계였죠. 또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닭이나 달걀도 생겨나기 이전의 시간을 얘기하는 거예요. 저는 1시간 전, 어제, 1년 전 밖에 모르고 살아왔는데 우리가 있기 이전, 태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거죠. 그리고 ‘백마 탄 초인’이 나옵니다. 저는 시골에서 돼지나 닭만 봤지 백마는 상상의 동물이었어요. 게다가 초인은 보통 ‘인간을 넘어선 대인간’을 말하잖아요.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그렇게 커다란 공간, 내가 모르는 시간, 동물, 초인까지 맞닥뜨리니까 섬찟하고 시로부터 도망가버렸어요.”
처음 만난 시는 무서운 존재였군요. 그 후에는 어떤 것에 관심 가지셨나요?
“저희 집은 농사짓는 집안이라 책이 없었는데 외갓집에는 책이 많았어요. 외삼촌은 낭만적 사회주의자셨거든요. 외갓집 서재에서 책을 읽다 반고흐를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중학교 미술부에 들어갔어요. 1년만에 교내 그림대회 1등을 거머쥐었죠. 그렇게 화가를 꿈꿨습니다.”
 
반고흐의 자화상. 고은은 그를 보고 화가를 꿈꿨다. [사진 위키피디아]

반고흐의 자화상. 고은은 그를 보고 화가를 꿈꿨다. [사진 위키피디아]

 
화가의 꿈을 접고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나요?
“밤 늦은 시간, 하굣길에 어떤 빛이 저한테 왔어요. 길가에 무언가가 반짝이길래 가까이 가서 보니 한하운 시집 신간이더군요. 코팅된 겉표지에 빛이 반사돼서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튼 그 책을 저에게 온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문둥병에 걸려 눈썹이 다 빠지고, 발톱이 썩어서 빠져나가고, 먼 길을 떠나는 내용의 시집이었어요. 그렇게 처절한 시가 저한테 무척 와 닿더군요. 그 시집을 밤새서 다 읽고 두 가지를 결심했어요.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릴 것, 그리고 이런 시를 쓸 것.”
어린 중학생이 그런 시에 감정이입 했다는 게 신기합니다.
“태생적으로 그런 정서와 맞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항상 ‘떠나는 것’과 관련된 그림을 그렸거든요.날아가는 새나 떠나는 돛단배 같은 것들이요. 아버지는 제 그림을 보시고는 항상 왜 집이나 산처럼 안정된 건 그리지 않느냐고 하셨죠. 한하운 시집에도 길을 하염없이 떠나는 내용이 많았어요. 그 시를 보고 ‘언젠간 나도 집을 떠나야지’ 생각했죠.”
 
한하운 시초. 고은 시인은 한하운 시를 사랑한 나머지 "한센병에 걸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사진 한국문예신문]

한하운 시초. 고은 시인은 한하운 시를 사랑한 나머지 "한센병에 걸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사진 한국문예신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中 -
 
집을 떠난 적이 있으신가요?
“집을 떠날 새도 없이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화가가 된다는 꿈, 한하운 같은 시인 되고 싶다는 꿈 모두 끝나버렸죠. 동네 아저씨들이랑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고, 밤하늘에 쏟아져 내릴듯한 별을 보던 마을에 이데올로기가 덮쳐왔습니다. 반복되는 보복과 학살, 그리고 죽음밖에 남지 않았죠. 농촌 소년이 가지고 있던 순정은 갈기갈기 찢어져버렸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선한 사람들을 악하게 만들고 죽여버렸어요. 아저씨, 형님, 고향, 이웃, 박애, 심지어는 아버지, 어머니까지 아무것도 아니게 돼버린 거죠. 전 완전히 인간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매 맞아서 죽는 사람부터 현실을 못 이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까지 봤으니까요.”
특히 기억에 남는 죽음이 있으신지요?
“저와 두터운 친구였던 봉태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항상 저랑 1, 2등을 다투던 선의의 라이벌이었죠. 이 친구의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고, 봉태까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아이가 끌려가면서 저를 쳐다보던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저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아이를 못 살린 게 아직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한이 맺혀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하셨겠군요.
“전국이 폐허가 된 건 물론 인간의 마음, 혼조차도 폐허가 되더군요. 인간성, 도덕, 선 같은 것들은 사회가 적당히 유지될 때 우리를 규정해줄 뿐이지 극한 상황이 오면 아무 의미 없어져버립니다.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조각 같은 가치와 관념 가지고 우리는 살고 있는 거죠. 그걸 저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어요. 그리고 죽음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죽음 바이러스가 저한테까지 옮겨오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아무 의미 없고, 죽음만이 의미 있다고 느껴져 자살을 시도했어요. 아주 주도면밀하게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마다 장애물이 저를 살렸어요.”
스스로 삶의 끈을 놓으려 한 상황들이 궁금합니다.
“제 친구 중 나병재라는 추상화가가 있어요. 그 친구가 집을 비우게 돼서 독약을 사와 방에서 죽으려고 했죠. 그런데 며칠 있다 온다 그랬던 친구가 바로 온 거예요. 저를 발견하고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 병원에 데려가서 약을 뱉어내게 한 겁니다. 또 한번은 제가 자꾸 집을 떠나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저를 미군 부두의 검수관으로 취직시켰어요. 부두에 배가 정착하면 그 사이에 공간이 있어요. 배가 부딪히지 않도록 타이어 같은 완충제를 끼우죠. 배 아래에는 스크류가 있는데, 그 사이로 들어가 죽으려고 했어요. 자정이 넘은 시간 부두는 참 고요하거든요. 그 시간에 물에 뛰어들어 일부러 물을 먹었어요. 빨리 죽으려고. 그런데 한 세 번 먹으니까 무의식 중에 살려고 허우적댄 거예요. 그때 마침 그 배 안에 있던 일본인 항해사가 배 위로 나왔고요. 저를 발견하고 로프를 내렸는데, 그 로프가 제 팔에 우연히 걸려서 구출됐어요. 의식을 차린 후 그 일본인 항해사가 저를 선실로 데려갔어요. 그리고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을 주면서 ‘부디 실패하지 말고 살아서 성공하라’고 말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건 그 항해사는 얼마 뒤 배가 침몰해서 사망했어요. 그게 무슨 운명인가 싶더라고요. 저만 살리고 본인은 죽었으니까요. 아직까지 이름을 기억해요. 하시다 고오진(橋田公臣).
그 다음에는 제주도로 죽으러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바다에 뛰어내리려고 했죠. 제 시체가 떠오르는 건 싫었기 때문에 배낭에 돌을 넣어 갔어요. 그날따라 제주해협이 아주 잔잔하더군요. 월광이 바다에 비치니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내 마지막 길을 축복해주는구나, 고맙다’하고 소주를 마셨어요. 옛날엔 배에서 소주를 팔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안 취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정신보다 몸이 못 버텨서 쓰러져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제주도에 벌써 도착했더군요. 돌을 주섬주섬 바다에 던져버리고 제주도에서 3년동안 영주(永住) 했어요. 제주도는 유일하게 통금이 없는 지역이었어요. 항상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집으로 가려면 공동묘지를 지나가야 했는데 거기 쓰러져 자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 묘지를 많이 노래했어요. 6.25를 겪고 난 이후로 묘지가 편하고 죽음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았거든요. 지금은 안 그렇지만요. 지금은 공동묘지는 죽어서나 갈 생각이에요.
4번째 자살 시도는 70년도쯤 정릉에서 했습니다. 수면제를 100알쯤 모아서 사람이 안 다니는 골짜기로 갔어요. 첫눈이 내리더군요. ‘내 마지막을 축복해주는구나’하고 수면제를 먹었어요. 그런데 그날 마침 예비군 훈련이 있었고, 하필 정릉이 간첩지구로 설정돼서 특별작전을 연습한 거예요. 처음 군인들이 저를 발견했을 땐 죽은 줄 알고 정릉 청수장 마당에 던져놨대요. 자세히 보니까 간첩은 아닌 거 같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몇 푼 있으니까 거지도 아닌 것 같아서 병원에 보낸 겁니다. 이틀 만에 일어나 제 후배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문병 왔어요.”
그 뒤로는 시도하지 않으셨나요?
“무교동에서 술을 마셨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늦으면 여관에서 자야 했는데, 돈이 없으면 술집주인한테 빌어서 탁자에서 자기도 했어요. 그 낡은 탁자에서 자다가 떨어지면 그냥 시멘트 바닥에서 자는 거예요. 눈을 뜨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문지 조각이 있어 보니까 전태일 분신자살 기사가 있더군요. ‘내가 늘 죽으려고 하는 죽음과 이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나만을 위해서 늘 죽으려고 했는데. 이 사람은 노동자를 위해서 죽으려고 하는구나.’ 그 죽음에 빠져들어갔어요. 전태일의 죽음이 저를 돌려놓은 거죠. 그 전까지 저는 현실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비참여주의자였어요. 냉소주의도 아니고 그냥 현실이 싫었어요.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낮에 나오면 흐리멍텅한 상태로 사람 만나고. 그런데 전태일을 보면서 세상을 깨우치고 시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 죽음을 통해서 여러 지식인들이 깨어났어요. 그 후로 저는 현실참여자가 됐고, 삼선개헌반대, 민주회복 이런 운동들에 참여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10년동안 시달리던 불면증도 없어지더군요.”
전태일의 죽음 이후 존재의 이유를 찾으신 거네요.
“제 인생은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눠졌습니다. 전태일을 만난 후로는 죽음에 관한 건 저 멀리 가버렸고, 노력하며 살았어요. 노동운동에도 참여하고 감옥살이도 했죠. 그래서 저를 민족시인, 국민시인이라고 부르는데, 전 그렇게 불리는 게 싫어요. 저항시는 옛날에 쓰던 거고, 저는 자기자신을 규정해 놓고 싶지 않아요. 저는 엄마의 아들도 아니고, 할머니의 손자도 아니고, 저는 접니다.”
 
‘바람의사상’에는 고은 시인의 철학이 담겨있다. [사진 한길사]

‘바람의사상’에는 고은 시인의 철학이 담겨있다. [사진 한길사]

 
‘바람의 사상’은 고은 시인이 직접 쓴 70년대 일기다. 유신의 거친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양심을 지키려 노력한 젊은 시인의 열정과 좌절이 날 것 그대로 써져 있다.


교장 아베의 수신(修身) 시간이었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
교장이 대답을 재촉했고 나는 대답했어.
“예잇! 천황폐하가 되어 대일본제국을 다스리겠습니다.”
이날 어린 고은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눈물자국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6개월 간의 정학 처분 중 3개월이 지나자 교장은 다시 물었다.
“이제부터 너는 뭐가 되고 싶은가?”
나는 즉각 대답했지.
“우편배달부가 되겠습니다.”
“왜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은가?”
“세상 사람들의 기쁜 소식과 슬픔 소식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이 대답에 교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 말했어.
“그런 것은 이 전쟁을 이긴 뒤에나 할 수 있다.”


고은 시인은 우편배달부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슬픈 감성을 담아내는 시를 쓰고 있다.
 
승려의 길은 어떻게 걷게 되신 건가요?
“고모의 조카가 큰 사립학교를 운영하는데 사립 중학교(군산 북중학교)에 저를 국어교사로 특채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마을에서 저를 신동이라고 불렀거든요. 첫 수업을 하는데 교장(사돈)이 뒤에서 팔짱 끼고 제가 뭘 가르치는지 시험하듯이 봤어요. 그렇게 1시간을 수업했는데 ‘좋다, 그대로만 해라’고 하셔서 교사를 하게 됐죠.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승려를 만나 입산했어요. 사실 교사도 아버지가 제가 자꾸 떠나려고 하니까 안정시키려고 시킨 거예요. 그 당시에는 산에 빨치산들이 있으니까 승려들이 산에 있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 승려를 길거리에서 만난 거죠.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말도 안하고 승려를 무작정 따라갔어요.”
우연히 시집을 발견하고 시인이 되신 것도, 떠돌이 승려를 만나 따라가신 것도 길에서 생긴 일이잖아요. 선생님의 운명은 주로 길에서 있었네요.
“맞아요. 그 승려는 빈델반트, 칸트, 헤겔, 노자, 장자, 짐멜까지 다 익힌 분이었어요. 저는 그 분을 따라다니며 속성으로 그런걸 다 배웠죠. 그 분의 얘기를 듣고 나름대로 제 글을 써보기도 했는데 그 글을 보시고 저를 인정해주시더라고요. 나중에는 친해져서 앞으로는 ‘네가 며칠 스승을 해라. 내가 창작을 하겠다.’ 그런 얘기도 하셨어요. 하루는 잘 데가 없어서 고아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고아원 보모 중 한 분이랑 승려님이랑 눈이 맞은 거예요. 저한테 ‘너는 떠나라. 나는 여기 있겠다’ 라고 말하시더군요.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저 혼자 가라고 하시니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울면서 통영 용화사로 갔어요. 너무 배가 고파 중간에 남의 집 무도 뽑아먹으면서 절에 도착했더니 효봉스님이 저를 보자마자 그래요. ‘밥을 안 먹었겠구나. 밥을 먹어라.’ 절 알아보신 거죠. 거기서 스님 시봉하면서 중 노릇을 했어요.”
문단에는 어떻게 등단하셨는지요?
“사실 제 의지로 등단한 건 아니에요. 나병재 화가한테 시 조각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신문에 난 시인 모집공고를 보고 제 시를 보낸 거예요. 그 당시 유치환이나 조지훈 같은 시인들이 신문에 시를 썼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저도 모르게 지원해서 얼떨결에 신인이 돼버렸죠. 그리고 저는 불교신문 초대 주필이었어요. 절에서 불교신문이랑 잡지를 만들었는데, 편집 기술이 없다 보니 빈 공간이 생겨요. 그럼 그 공간을 채우려고 제 시를 넣고 그랬죠. 효봉스님을 좋아하는 교통부 국장이 늘 절을 찾아왔었는데 저랑도 친해지게 됐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분이 월북 소설가 이태준 전문가더라고요. 그 분이 제 시를 보고는 이런 시가 몇 개나 되냐고 묻더군요. 제가 10개정도 된다 그랬더니 5개만 골라보래요. 며칠 뒤에 저한테 갈 데가 있다고 데려간 곳에 마포에 있는 서정주 시인의 집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한 순간에 신인 시인이 됐어요.”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 삶이 이어졌군요.
“제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제 아내가 없었다면 90년대 초쯤에 죽지 않았을까 싶어요. 83년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 저는 완전 헛깨비 같았어요. 저는 노동운동을 하면서부터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교조주의 기질이 있어서 술, 담배 심지어 돈 몇 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어요. 영등포에 노동학교 교장을 하면서 원고료 몇 푼 번 거 모두 거기에 쏟아 부었죠. 학생들 택시비까지 다 내줬으니까요. 그렇게 감옥살이를 하다 나왔는데 전두환 세상이 됐고, 제 이름은 세상에 없어져버렸어요. 작가주소에도 없고,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너무 허무했죠. 그때 술 한잔 먹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술을 먹기 시작했어요. 담배는 안 아직까지 안 피고요.”
 
항상 길에서운명을 만났다는 고은 시인. 최정동 기자

항상 길에서운명을 만났다는 고은 시인. 최정동 기자

 
어떤 상황에서든 그 순간에 진실하신 것 같아요.
“저는 자학도 하고 자기 부정도 하고 있어요. 그런 게 저한테는 사유적으로 와 있죠. ‘자아’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불교의 무아와 같은 거죠. 자기 부정이 자기 철학, 사유를 펼치는 역할도 해줘요. 자기부정은 우리 사회 어디에든 다 있어요.”
늘 다른 손에 이끌린 삶이신데, 남은 길은 어떤 길이었으면 하시는지요?
“그건 저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질문이에요.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 라거나, 어떻게 될 거라는 예상이나, 그런 미래가 저한테는 없어요. 미래는 저에게 상상의 세계고 그게 있어야 제 현재와 현실이 풍부해질 뿐이지, 미래의 나를 설정하진 않아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한 거군요.
“사실은 현재도 없는 거예요. 지금 얘기하자마자 현재는 과거가 돼버리잖아요. 미래는 현재가 돼버리고요. 저희는 과정에 있을 뿐이죠. 길 위에 있을 뿐입니다. 먼지 나는 황톳길, 히말라야 높은 고개도 있고. 제가 중앙일보 10회 동안 글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6회까지만 쓰고 못 쓴 적이 있어요. 아무 준비도 없이 히말라야 6500m까지 올라갔다가 고산병으로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글을 못쓰겠더라고요. 그 뒤로는 절필했어요. 절필한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중앙일보에서 북한에 가자고 하더군요. 북한 산천을 돌아다니니까 글 쓰기가 회복되는 거예요. 우리 조국의 산을 다니니까 힘이 나는 거죠.”
자고 싶은데 시가 못 자게 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 내렸을 때였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보낸 반년 동안 총 하루에 3편씩 총 607편의 시를 쏟아 냈어요. 시가 그냥 제게 왔어요. 그 시들을 묶어 『무제 시편』(창비)로 출간했습니다. 주변 시인들은 저보고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여전히 청춘으로 사는 귀신이라고 하고 시 없이는 이미 죽었을 사람, 시가 있어 평생 살아 남을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서재에 가면 자궁 속처럼 편안하시다고요.
“자궁 속은 떠 있는 거 같은 상태잖아요. 제가 서재에 가 있으면 그런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의 원인들이 저한테 아직 있는 것 같아요. 서재자체가 어머니의 몸이고 저는 그 속에 있는 것 같고 지독하게 안전해요. 세상의 모든 조건들이 저한테 개입하지 않고. 외부의 태풍이나 소나기, 가뭄도 없잖아요. 가장 안락한 공간. 그걸 느껴요. 태아 때의 머나먼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아요. 저는 책을 읽으면 그대로 기억이 안되고 바로 화학반응이 일어나요. 바로 다른 말로 옮겨버리죠. 내 것으로 만들어 다른 기억을 만들어내요. ‘왔다’라고 끝나면 저는 ‘여기서 왔다가 저기로 갔을 것이다’. 악습이라면 악습이고 특징이라면 특징이죠.”
 
자궁처럼 편한 서재에서 글을 읽고 있는고은. [중앙포토]

자궁처럼 편한 서재에서 글을 읽고 있는고은. [중앙포토]

 
가을이 시인의 계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을은 왜 시일까요?
“‘가을은 소설이 아니다. 가을은 시다.’ 우리는 그대로의 사람이 아니잖아요. 살아온 세월이 아니라 다른 내가 되는 거죠. 제가 니체를 참 좋아해요. 니체 생일이 10월 15일인가 그럴 겁니다. 흔히 하는 말이 니체가 가을을 좋아해서 자신의 생일을 옮겼다는 말이 있어요. 진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니체가 좋아서 그가 늘 산책하던 질스 마리아에 머무른 적도 있어요. 그 사람이 살던 방도 가봤고요.”
니체가 그렇게 와 닿는 이유가 있나요?
“그 사람의 언어는 아주 체질적으로 맞아요. 종잡을 수 없는 언어가 저랑 비슷하죠. 니체는 인간이 낙타,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가 된다고 했어요. 우리는 지금 한 사람이지만 누구의 엄마, 딸, 손녀, 전 연인일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페르소나가 있죠. 아기가 생기면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가 생기잖아요. 하나가 하나가 아닌 거예요. 나는 우주의 쓰레기가 모여 만들어진 거예요. 길바닥에 웅덩이가 생기면 버러지가 생겼다가 물이 마르면 싹 없어지죠.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내 산소, 탄소, 유전인자 전부 별 부스러기에서 온 거예요. 누구나 다 그래요. 노인들을 보면 어릴 때로 돌아가잖아요. 잘 걷지도 못하고 정신상태도 어린애처럼. 그건 니체만의 위대한 언어가 아니라 세상이 다 그래요.”
미완의 우리 문학사를 탄식하셨습니다.
“시대적 환경으로 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요절했어요. 김소월 신인은 신문학을 받아들인 5~10년 안에 완전히 체화해 우리 시를 쓴 사람이지만 ‘진달래꽃’ 하나 내놓고 죽어버렸죠. 그 요절을 어떻게 해서든 의미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중단돼버린 겁니다. 이상 역시 모험의 세계, 두려운 세계,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세계까지 가버린 20대 끝에서 죽어버렸고요. 귀중한 작가들이 안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죽은 사람이 많아요. 우리의 근대문학 중 주요한 부분은 전부 중단되거나 망실된 겁니다. 제가 스스로 죽으려던 순간마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지켰던 이유는 분명해요. 일찍 스러져간 시인들의 시간을 대신해 '시(詩)'로 '영원(永遠)'을 토해야 했기 때문이죠.”
 
어느 전기 / 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한 삶의 나비로 태어났다
빛 앞에서
아주 작은 눈이 떴다
어둠 속에서
아주 얇은 날개가 돋았다
바다를 모르는
폭풍을 모르는
한 마리의 나비는
언제나 망한 나라의 잎새에 내려앉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갔다

불멸이 얼마나 허황한가를
처음부터 알고있는 듯
오직 위대한 것은 낙조뿐인 들녘에서
낮은 식민지
밤은 나의 조국이었다
그런 밤에 금지된 모국어가
아무도 몰래 내 잠든 몸속에서 두런거렸다

해방이 왔다
모국어가 찬란했다

전쟁이 왔다
폐허에서
폐허의 주검 사이에서
피 묻은 모국어가 살아남았다
그 모국어로 노래했다

나의 노래는 애도이고
나의 노래는 누구의 환생이었다
또한 나의 노래는
불멸이 아니라
소멸의 노래였다

독재와 총 앞에 섰다
나의 주술이
몇 번인가 갇혔다
모순은
모순의 서사와
모순 거절의 서정을 낳았다

아직도 지난 날의 어린 나비는
지상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의 진실들을 꿈꾼다
삶은 미완의 내면으로 떠돈다

남은 꿈은 하나
먼 내일의 땅 속 나비화석은
노래화석이기를

 
대한민국독서대전 기조강연에서 '책은 문명이 만든 것이 아니라 生이 만드는 절실한 요구의 결과다' '책은 잃어버린 어머니의 자궁'이라고 하시며 '책 안에 세계가 들어 있고 술과 밥과 책이 제일 맛있다'라고 하신다.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에서 오래 전부터 이미 '어린아이' 단계인 세계인이 좋아하는 시인, 고은 선생님과의 대화는 한국근대사 속 어느 현장에 있는 듯, 웃다 참담해지다 고개를 끄덕이며 뭉클해지다 보니 약속된 시간이 지나버렸다. 준비해간 '질문'이 소용(所用)되지 않았다.


배양숙 (사)서울인문포럼 이사장 betterlife65@daum.net
정리 = 장하니 인턴기자 chang.hany@joongang.co.kr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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