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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문학적 정서, 애니메이션으로 느껴보세요

‘소나기’의 주인공이 나뭇잎으로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미지 그림.

‘소나기’의 주인공이 나뭇잎으로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미지 그림.

‘소나기’

‘소나기’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시골 소년과 서울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을 담백하게 그려낸 소설가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지난달 31일 개봉됐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으로 한국 근대문학 소설 영상화 작업에 나섰던 안재훈(48) 감독이 3년 만에 다시 내놓는 작품이다.
 
안재훈 감독

안재훈 감독

컴퓨터로 만드는 3D 입체 애니메이션이 대세가 된 요즘, 그는 여전히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다. 사람의 손끝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으로 그려진 그림을 통해 표현된 한국인의 흥과 한이야말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믿는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일구고 있는 안 감독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소설을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그림으로 보는 재미
황순원 선생님과 포즈를 취한 ‘소나기’ 주인공들

황순원 선생님과 포즈를 취한 ‘소나기’ 주인공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봄봄』을 묶어 각각 2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선보인 것이 2014년이다.
이번 ‘소나기’가 두 번째 작품인데, 이렇게 한국 단편 소설의
영상화에 천착하는 이유가 뭔가.
“한국인의 정서가 듬뿍 담긴 우리 단편소설을 누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주면 정말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새로 해석된 문학을 본다는 것이 근사하지 않나. 소설로 읽었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최신 도구로 전달됐을 때 느껴지는 색다른 감동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라는 콘텐트도 점점 상업적으로 가게 되다 보니 앞으로 이런 것을 만들 기회가 줄어들 것 같다는 생각에 직접 만들게 됐다.”  
 
이번 작품은 48분으로 전작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
“시즌1을 끝내며 관객들이 감독의 해석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이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원래 황순원의 ‘소나기’와 김동리의 ‘무녀도’를 묶어서 선보이고 싶었으나 만들다 보니 작품들이 좀 길어졌다. 12월에 개봉할 예정인 ‘무녀도’는 1시간 20분 분량이다.”  
 
첫 작품으로 ‘소나기’를 하고 싶었는데
황순원 선생님 가족 설득이 어려웠다고 들었다.
“아드님이신 시인 황동규 선생님은 ‘소설은 소설로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완곡하게 거절하시기에 자주 전화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작업한 결과물도 보여드렸다. 1년 정도 그렇게 하니 ‘자네들이라면 잘 해줄 수 있을 것 같네’ 말씀해주셨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제작을 했나.
“나의 첫 작업은 소설을 원고지에 필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품과 캐릭터에 녹아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을 내 손으로 직접 그린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그 마음이 관객에게 온전하게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가끔 감독으로서 해석을 붙이고 싶다거나 이렇게 하면 관객들에게 먹히겠는데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원작에 최대한 충실했다. 작업 중 떠오른 아이디어는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 때 써먹을 생각이다.”  
 
소년 소녀의 심리묘사를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림 배우’에게 연기를 시키는 것도 그렇고.
“전작인 ‘운수 좋은 날’이나 ‘봄봄’은 글을 읽으면 뭔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 작품은 황 선생님이 워낙 군더더기 없이 쓰셔서 형상화를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표현이나 동작을 좀 과하게 하면 몸 개그가 되기 십상이어서 황순원의 ‘소나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면에서 소녀가 좀더 잔망스러웠으면, 마지막 소년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감정을 고양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지않아도 마지막 대목에서 왈칵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아이에게 감정을 집어넣고 보니 원작과 더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에 친구가 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를 떠올려보니 ‘뭐지, 그럼 이제 못 만나는 건가’ 정도로 멀뚱멀뚱했다. 그 정도로만 표현하려고 했다.”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것이 배경이다. 우리나라 시골의 초가을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배경이 된 장소가 있었나.
“원작에는 경기도 양수리 어딘가가 배경이다. 그래서 양평 소나기 문학관에도 가보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돌 하나 풀 하나 자세히 보려고 했다. 작품 속 산세가 첩첩산중은 아니고 들녘 야산 정도의 느낌을 담았다.”
 
중장년층의 향수를 되살리는 풍경도 많다. 원두막·갈대숲·모깃불·
허수아비·고무줄놀이·술래잡기가 모두 정겹다.
“소설에는 설명이 그렇게 자세하지 않다. 옛날 학교를 보여주기 위해 원작에 없는 광경도 집어넣었다. 빈 공간이 어색하면 안되니까.”  
 
싸리꽃, 등꽃, 도라지꽃을 소개하는 장면도 예쁘고.
“계절에 어울리는 꽃으로 최대한 맞췄다. 특히 어릴 적에 보라색 도라지꽃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저것을 영화든 그림이든 언젠가는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적절하게 활용한 것 같다.”  
 
안재훈·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메밀꽃 필 무렵’

안재훈·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메밀꽃 필 무렵’

‘소나기’와 ‘무녀도’의 흥행 결과가 다음 작품의 관건
안재훈 감독은 역시 애니메이터인 부인 한혜진 감독과 함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를 설립하고 수채화 느낌이 물씬 나는 서정적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해왔다.
 
컴퓨터 시대에 손 그림을 고수하는 이유는 뭔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구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도구니까. 물론 어떤 것은 무조건 안 돼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은 혁신과 변화보다는 어떻게 더 잘 해내느냐에 관심이 많다.”  
 
그려진 그림도 꽤 많겠다.
“추려진 원화(중요 그림)와 동화(원화와 원화를 잇는 사잇 그림)만 3만 장이 넘고 하다가 버린 것까지 치면 30만 장은 될 것이다.”
 
‘연필로 명상하기’에는 직원들이 몇 명인가.
“18명 가량 된다. 이들이 원화를 일부 그리고 일부는 외부에 하청을 준다. 또 중국 장춘에 중국인 직원 6명이 3D 제작 일부를 맡는다.”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고 손익분기점은 몇 명인가.
“3억 원 가량 들었고, EBS를 비롯해 여러 고마운 분들이 도와주셨다. 손익분기점은 15만 명이다. 시즌1의 경우 20개 개봉관에서 선보여 3만 7000명 정도 들었다. 흥행이라는 게 개봉관 수에 비례하지 않나. 거기 비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스크린 수가 60개로 늘어났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운수 좋은 날’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운수 좋은 날’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봄봄’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봄봄’

‘소중한 날의 꿈’

‘소중한 날의 꿈’

11년간 준비해 2011년 선보인 창작 장편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이 ‘트랜스포머3’에 밀려 일주일 만에 내렸다.
얼마나 아쉬웠나.
“그때는 첫 장편 개봉이라 배급 구조나 극장 환경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었다. 작품만 잘 만들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림만 그리던 사람으로서는 알아야할 게 너무 많았다. 그때부터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마케팅에 적극적이 됐나.
“‘소중한 날의 꿈’을 본 관객분들은 누가 만들었는지 많이 궁금해 하셨다. 그래서 전국을 돌며 100번도 넘게 강연회를 했다. 유례없는 일이다. ‘메밀꽃…’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마케팅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번에는 스태프들과 함께 관객들에게 캐리커쳐 그려드리기 행사를 시작한다. 지난번에는 혼자 했는데 이번에는 7~8명이 같이 한다. 이름하여 ‘연필심(心) 관객애(愛)’ 프로젝트다.”  
 
평소 매출은 어떻게 내나.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작품 수익은 천천히 조금씩 나온다. 한 번에 뭐가 되지는 않지만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다. 광고 제의도 있지만 다 거절하고 작품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했는데 관객이 선택을 안 해주시면 못 만드는 때가 오겠지. 우리가 소설의 영상화 작업을 하는 것은 연명하는 것 아니다. 할 때까지는 씩씩하게, 멋지게 하겠다는 것이 나와 스태프들의 생각이다. 유지를 위한 유지는 하지 않는다.”
 
많이 발전했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을 계속 하는 이유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미국과 일본 작품을 비교해보면 우리는 별로 내놓을 게 없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저희 스튜디오가 한국 애니메이션 관객을 조금씩 늘려왔다는 자부심은 있다.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고 우리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스태프들은 그래서 나의 ‘동지’다.”  
 
향후 작품은.
“이상의 ‘날개’와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시즌3로 구상하고 있지만, 이것도 ‘소나기’와 ‘무녀도’의 흥행결과에 달려있다. 여기까지가 우리 스튜디오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문화로 자리 잡지 않는다면, 조금 숨을 돌릴 생각이다.”
 
극장용 장편으로 준비해 영화 마켓에서 호평 받은
‘천년의 동행:살아오름’이 얼마 전 히트한 드라마
‘도깨비’와 너무 비슷했다던데.
“내년 말 90분 물로 완성할 예정이었는데…우리도 깜짝 놀랐다. 세상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다. 다시 우리만의 내용으로 수정보완해서 선보일 생각이다.”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연필로 명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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