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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한국 원전, 산업혁명 발상지에 깃발 꽂아라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이 에너지 자립을 이룬 출발점은 1957년 이승만 정부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연구용 원자로를 확보했을 때부터였다. 그 이후 고리 1호기 원자로에 77년 6월 처음 점화하기까지 걸린 세월은 20년에 달한다. 기술도 부품도 없이 시작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에너지 자립의 길은 험난했다. 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가 덮칠 때마다 주무 장관이 중동으로 달려가 애걸하다시피 원유를 구해와야 했다. 이런 시대를 거쳐 25기까지 늘어난 원자력발전소는 국내 전력 공급의 30%를 책임지는 핵심 발전원(發電源)이 됐다.
 
세월은 더 흘러 독자 기술로 한국형 원자력 노형 APR-1400이 개발됐다. 해외에서도 그 기술력과 안정성을 인정받아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에 성공했다. APR-1400은 건설 중단이 논의되는 신고리 5, 6호기에 들어가는 원전이다. 신고리 3호기에서 가동 중인 데다 에너지 다변화 차원에서 중동 산유국이 선택한 원전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런 성과를 발판으로 한국 원전은 250년 전 산업혁명의 발상지였던 영국 땅에서도 불꽃을 피울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영국은 북해유전을 둔 산유국이면서도 ‘에너지 믹스’ 차원에서 전력 공급의 19%를 원전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노후 원전의 교체가 끊임없다. 여기에는 프랑스·중국·일본 업체가 참여해왔다.
 
그런데 이 중 일본이 주도했던 무어사이드·월파·올드베리 지역에 뜻밖의 문제가 발생한다. 당초 도시바·히타치의 수주가 유력했으나 이들 기업의 내부 경영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영국은 한국전력·한국수력원자력에 참여 의사를 타진해왔다. 영국은 최근 한국형 원전도 자국 내 건설이 가능한 노형에 포함했다.
 
이것이 영국에 건설되면 산업혁명 발상지에 한국 원전의 깃발을 꽂는 역사를 쓰게 된다. 이를 교두보로 동유럽과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중남미에도 한국 원전의 수출 길을 열 수 있다. 그런데 신고리 5, 6호기 건설이 영구 중단되면 이 꿈은 물거품이 된다.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이 자국 내 제조업에 소홀한 결과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었듯이 한국도 국내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 기술력 퇴보가 불 보듯 뻔하다. 스리마일 원전 사고 이후 원전 생태계가 크게 약화된 미국이 바로 그런 경우다. 최근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에 2기씩 원전 건설을 추진해왔는데 전문인력과 부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스리마일 트라우마에다 셰일가스 등으로 에너지 가격까지 낮아지면서 원전 투자를 소홀히 한 탓이다. 미국이 소극적인 사이 중국·러시아가 자국 내 원전 건설을 바탕으로 수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세계 원전시장의 기술 주도권을 장악할 기세다.
 
신고리 5, 6호기 건설이 영구 중단되면 한국은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질지 모른다. 산유국조차 미래 석유 고갈에 대비해 원전을 건설하듯 앞으로도 에너지 다변화를 위해 탈원전이 생각대로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전 생태계가 무너져 미국처럼 곤경에 빠지거나, 성급하게 탈원전을 추진하다 대규모 블랙아웃이 발생한 대만 꼴이 날 수 있다.
 
첨단기술은 어느 기업, 어느 나라도 함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주항공·원전·반도체가 다 그렇다. 이들 분야에선 논문도 잘 나오지 않는다. 원천기술 유출 우려 때문이다. 원전은 반도체와 함께 우리가 어렵게 쌓아올린 자립기술이다. 나아가 세계 시장 진출의 문턱까지 왔는데 탈원전의 주술에 걸려 60년 공들인 기술 계승·발전이 중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10월 21일 공론화 결과를 내놓는다. 결과는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건설이 영구 중단되면 760개 업체 5만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고 원전 생태계가 흔들리게 된다. 국내에서도 쓰지 못하게 하는 기술을 영국이 갖다 쓸 이유가 있겠는가. 신념이 아니라 실용주의가 절실한 시점이다.
 
김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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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은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