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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지하 1000m 갱도에서 동료 죽음 지켜봐"…군함도 징용 생존자 이인우 옹 인터뷰

“1945년 8월 27일 부산항에 내려 태극기를 처음 봤지. 그때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더라고. 부산에서 고향 대구까지 7시간 기차를 탔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고향 집 앞에 왔는데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오셨어. 둘이 붙잡고 펑펑 울었지. 아버지는 뒤에서 담담하게 ‘나 모르게 도망가더니만 너 고생만 실컷하고 왔구나’ 하시고….”
 
일본 하시마(端島)섬 강제징용 생존자 이인우(92)씨가 9일 대구 자택에서 당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일본 하시마(端島)섬 강제징용 생존자 이인우(92)씨가 9일 대구 자택에서 당시를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백발의 이인우(92)씨는 72년 전 부모님과의 상봉 장면을 회고하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일제 시대 징용 피해자다. 1944년 사할린을 거쳐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端島)에 강제 징용됐다. 9일 오후 대구의 자택에서 만난 이씨는 72년 전 기적적으로 생환한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그는 경북 경산군 안심면 사복동 41번지(현재 대구 동구)에서 7남매(아들 2, 딸5)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하나 뿐인 남동생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3년 동안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게 전부인 학력의 18살 소년은 배고픔이 지겨웠다. 가난이 싫었다.  
 
“집에 돈 많이 부칠 수 있다”는 말에 화물선 타
 
“면사무소 퇴직한 공무원들이 보국대(일제가 조선인 학생, 여성과 농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1938년 조직한 단체)를 모집하더라고. 공장에서 일하면 집에 돈을 많이 부칠 수 있다고. 그땐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지. 경산군청에 40명쯤 모여 같이 열차타고 부산으로 갔어. 나처럼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지. 일본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할 줄 알고….”
 
1944년 5월, 그렇게 이씨는 부산에서 화물선을 탔다. 400명 넘는 이들이 바닥에 앉아 구토를 해가며 물살을 견뎠다. 중간에 여자들이 내렸다. 7일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일본 본토가 아니었다. 사할린. 여름부터 겨울까지 그는 함께 온 이들과 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다. 대구에서 자란 그가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디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땐 힘들었는데 나중에 하시마랑 비교하면 힘든 것도 아니었지.”
    
이씨는 “광복 이후 태극기를 처음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말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이씨는 “광복 이후 태극기를 처음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말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사할린에서 콘크리트의 섬으로
 
눈보라가 치던 날, 이씨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화물선에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시마, 일명 군함도로 가는 배였다.

"배에서 섬을 봤는데, 콘크리트 담이 섬을 둘러싸고 7층쯤 되는 건물 2개가 우뚝 서있더라고."  

 
군함도는 야구장 2개 크기의 섬(남북 약 480m, 동서 약 160m)으로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다. 
19세기 후반 미쓰비시 그룹이 이곳을 탄광사업으로 개발해 큰 수익을 올렸다. 1960년대 일본 석탄업계 침체로 1974년 폐광됐다. 

 
군함도에서는 6명이 한 방을 썼다. 3명씩 2교대로 12시간씩 나가 일하고, 잠을 잤다. 훈도시(일본식 속옷)차림에 장비를 들고 해저 1000m로 석탄을 캐러 들어갔다. 
"중국인들과 같이 일을 하는데 말이 안통하니까 일은 더디고. 일본인 감독관은 계속 때리고. 너무 답답해서 나중엔 내가 중국어를 배웠어." 

 
지하 1000m 갱도에서 동료 죽음 지켜봐
 
구타는 일상이었고 사고를 당한 동료들은 시체가 돼 갱도를 나갔다.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바다 건너 육지가 보여. 닿을 것 같아. 그럼 어딘가 내 고향이 있겠구나 싶고. 별은 어디서나 똑같으니까 밤에 별을 보면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이 나고…."
 
막노동에 시달리던 한국인이 죽으면 하시마 옆의 작은 섬 화장터에서 시신을 태웠다. 시체 타는 냄새가 섬을 덮었다. 
"월급은 그때 돈으로 220원. 정비비, 세탁비, 식비 등을 다 빼면 150원이었어. 한국에서 우동 한그릇이 5전, 일당이 35전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지. 근데 이걸 5년 짜리 채권으로 주네. 결국 아무 것도 못받았지. 식사는 국, 밥, 반찬은 일본식 짠지 하나만 주고. 어느 날 동료들이랑 공장 근처에 나갔는데 거기서 콩 구운 걸 주먹만큼 팔아. 너무 먹고 싶은데 주머니에 돈이 있나. 아직도 그 냄새가 기억나."
 
이씨는 “이 나라가 우리에 대해 너무 늦게 관심을 가져 안타깝고 서운하다”고 말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이씨는 “이 나라가 우리에 대해 너무 늦게 관심을 가져 안타깝고 서운하다”고 말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군함도에서 다시 일본군으로 징집
 
1945년 7월, 일본인 감독관은 이씨에게 영장을 건넸다. 그는 일본군으로 징집돼 군함도를 떠났지만 다시 죽음 곁에 섰다. 
"히로시마에서 기차로 1시간쯤 더 가서 쿠레에 내려줬어. 거기서 관동군 소속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폭탄을 들고 미군 장갑차에 자폭하는 훈련을 받았지"
 
그는 살기 위해 죽음을 위한 훈련을 견뎠다. 40여 일이 지난 8월 15일 점심시간, 그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부대에서 라디오로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고 했을 때 '전쟁이 끝나나. 나도 살 수 있나. 아니면 미군장갑차가 들어올테니 나는 죽나' 별 생각이 다들었지. 라디오로 천황 항복 선언을 할 때 '아, 살았구나' 싶었어."
 
1945년 8월 27일, 이씨는 고국 땅을 밟았다. 
"사할린에서, 하시마에서 번 돈, 채권 다 하시마에 두고 왔지. 그래도 살아서 돌아온 게 어디야.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했지."
 
자식들에게도 숨긴 하시마의 악몽
 
이씨는 이후 1950년 6ㆍ25전쟁에도 참전했다. 경주 안강 전투와 포항 형산강 전투에 참전한 공으로 충무 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그는 장해7급의 상이군인이다. 이씨는 이후 소방대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이씨는 6.25전쟁에 참전해 안강전투에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나는 애국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말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이씨는 6.25전쟁에 참전해 안강전투에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나는 애국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말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그는 군함도에서의 경험을 10년전까지 자식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힘든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이상목(67)씨는 "어릴 적 아버지가 돈 벌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는 말만 하고 군함도 강제징용 이야기는 안했어요. 어느 날 혼자 서울 올라가셔서 조사위원회로부터 강제징용피해자 인정을 받으신 다음에야 자식들에게 말씀하셨죠"라고 말했다.  
 
"나는 애국자가 아니고 생존자다. 너무 늦게 알려졌다."
 
이인우씨는 "수십년 동안 하시마 강제 징용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 나는 애국자가 아니라 생존자일 뿐이야. 다만 이 나라가, 젊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걸, 하시마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어. 나라는 그동안 뭘했는지. 이미 너무 늦었어. 다 죽고 아무도 없잖아. 한 10년 전에만 이야기가 나왔어도 서로 얼굴도 보고 그럴텐데…." 이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일본정부는 2009년 하시마를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했다. 군함도는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인정돼 2015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군함도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500~800명, 당시 사망자는 121명이다. 현재 국내 생존자는 이인우씨를 포함해 6명이다. 
 
피해자지원재단은 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780만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추산한다. 정부가 2004년부터 2015년까지 11년 동안 접수한 강제동원 피해자 수는 국내외 22만 6000여명이다. 현재 강제동원 생존자는 국내외 1만명 미만으로 추산되며 그 숫자는 매년 줄고 있다.    
 
대구=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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