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이하경 칼럼] ‘친절한 재인씨’가 정의도 살린다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작가 김훈은 언젠가 “남한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니체를 읽었는데 “정의로운 사람은 빠르게 판단하지 않는다. (중략) 남의 말을 경청하는 자이고, 남에게 친절한 자다”는 문장에 끌렸다고 한다. 그리고 “많이 반성했다”고 토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원전 구상은 해볼 만한 시도다. 전 세계 6개 나라가 이미 탈원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미리 결론을 내려 놓고 임의기구인 공론화위원회가 총대를 메고 쫓기듯이 결정하는 건 곤란하다. 탈원전은 안전과 환경, 국가 에너지 수급 차원의 종합적 고려가 필요하다. 독일과 스위스도 30년간 씨름하다 의회 표결로 끝냈다. 스위스는 국민투표만 다섯 번 했다.
 
우리의 원전 의존도는 30%로 매우 높다. 섬이나 마찬가지인 나라여서 독일처럼 이웃나라에서 전기를 끌어오기도 어렵다. 대체 전력의 공급 안정성과 경제성, 전기료 부담, 산업경쟁력 저하, 수출경쟁력 상실의 정도 등 따져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공정률 28%를 넘긴 신고리 5, 6호기의 건설공사를 일시 중단하는 조치부터 내렸다. 그리고 석 달 만에 위원회가 영구중단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이해 당사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불친절한 접근이다.
 
불교철학자인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말하는 원효의 화쟁(和諍)론을 다시 음미하게 된다. 원효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예로 들면서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고 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이런 백가(百家)의 이쟁(異諍) 상황을 두고 원효는 “모두 옳다”(皆是·개시)고 했다. 각각의 주장이 코끼리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효는 “모두 틀렸다”(皆非·개비)고 한다. 코끼리의 전체를 생각하면 각각의 주장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개시·개비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다수의 옳음을 용인하는 것이며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더 큰 옳음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주장도 제한되거나 배제돼선 안 된다. 조 교수는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500여 년 전 세종은 백성을 괴롭히는 세제를 뜯어고치기 위해 공법(貢法)안을 만든 뒤 역사상 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백성 4분의 1인 17만 명이 참여해 57%가 찬성했지만 예상보다 반대(42%)가 많다며 시행을 보류했다. 긴 세월 동안 공론화를 거쳤고,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인 뒤에야 시행을 확정했다. 개혁에 착수한 지 17년 만인 1444년에 통과된 공법은 악질 관리의 수탈을 막는 정의로운 제도로 조선 초기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정부와 비교되는 세종의 신중한 접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일방통행은 외교안보에서도 적신호를 만났다. 김정은은 28일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문 대통령이 7월 6일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신베를린 선언’을 한 지 22일 만이다. “주변국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주도해 나가겠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무색해졌다.
 
2000년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했고 3개월 뒤 김정일과 6·15 정상회담을 한 것과 대비된다. 물론 지금과는 조건이 많이 달랐지만 김대중 정부는 물밑에서 꾸준히 교감하고 하루 전날 북한에 선언 내용을 전달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문 대통령의 ‘신베를린 선언’ 직후 북한이 왜 “대결의 저의가 깔려 있는 잠꼬대 같은 궤변”이라고 평가절하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갈등관계인 미국과 중국도 모든 수준에서 물밑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자신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실효성 있는 대북제재를 위해 미국과 빈틈없이 소통해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중국·북한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 탈원전 공론화는 이 정부의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운명적인 사안이 됐다. 문 대통령은 반대 의견이 설득력이 있으면 생각을 바꿔 탈핵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위원회의 활동 기간도 늘리고 최종 결정은 법적 권한이 있는 국회와 정부가 내려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의 분열을 막고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신·구교 갈등의 17세기 유럽인 파스칼은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진실이 저쪽에서는 진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진실의 상대성을 인정한 것이다. 공론화가 우리 편의 배타적 의견을 재확인하는 요식행위가 되면 공동체는 분열한다. 서두르지 않고 다른 의견을 경청하는 ‘친절한 재인씨’가 민주주의와 정의를 모두 살릴 것이다.
 
이하경 주필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