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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미(熱海)의 아지로(網代)에서 유배길을 떠난 ‘오다 줄리아’

기자
장상인 사진 장상인
-시즈오카(靜岡)의 역사 탐방(6)

1607년 5월 18일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일행 482명이 에도(江戶)로 가는 길이었다. 너무나 중요한 행렬이었기에, 측실이나 시녀들은 발꿈치를 아무리 세워도 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5년 후. 귀양 가는 여인이 있었다. 1612년 3월 20일이다. 그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네 번 째 부인의 시녀였다. 기막힌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슨푸(駿府) 성을 떠난 사흘 째, ‘오다’를 태운 죄수용 가마는 ‘미시마(三島)’의 여인숙을 출발했다. 니라야마와 오오히토를 거쳐서 산길을 넘어 아지로(網代)로 항(港)까지 갔다.>

오다 줄리아가 ‘40년 유배’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시즈오카의 슨푸성과 오다 줄리아

줄리아는 이에야스의 명령에 의해 이즈제도에 있는 오오시마(大島)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하지만, 줄리아는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그녀의 기도를 들어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따뜻한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성상과 묵주, 미사포... 교인으로서 갖춰야 할 물건들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유배를 떠난 항구까지의 고행

유배지를 떠나는 항구 아지로(網代)까지 가는 길은 돌이 많아서 특별히 가마가 준비됐다. 이 또한 이에야스의 배려였다. 줄리아는 궁을 돌아보면서 슨푸성을 향해 목례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였다. 가마는 한(恨) 많은 여인 줄리아를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험난한 산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줄리아는 가마를 세웠다.

“가마를 세워주세요. 여기서부터 걸어서 가겠습니다.”
“네? 이토록 험악한 산길을 걸어서 가신다고요?”
“네. 내려주세요”
“...”

가마꾼과 호송원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들은 줄리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줄리아는 가마에서 내려 맨발로 돌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가마나 수레를 타지 않으셨으며, 신발도 신지 않고 많은 피를 흘리며 가셨으므로 주님의 종인 저 자신도 이 길에서 주님의 고행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줄리아의 발에서 피가 흘렀다. 길가에서 그녀의 처절한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 걸음 한 걸음 피 자국이 남았다. 그래도 그녀는 고통을 참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발이 찢기고 피가 흘렀으나 얼굴은 지극히 평화스러웠다.

호송원들은 참다못해 억지로 그녀를 가마에 태웠다. ‘잘 보살피라’는 이에야스의 지엄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보다는 이에야스의 힘이 강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유배를 떠난 뱃길에서

이즈 제도에 연한 태평양

“이렇게 순결한 아가씨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험한 고뇌의 길을 걸어야 하나?”
“이에야스(家康)님의 수청을 거부했다 네요.”
“수청을 거부했다고요? 참으로 훌륭한 여인이군요.”

호송꾼들이 주고받는 대화다. 오다 줄리아는 그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고서 성가 ‘나는 믿나이다’를 불렀다.

나는 굳게 믿나이다.
주님 말씀 성세 때에 드린 맹세 충실하게 지키리다.
주께서 나를 택하여 교회로 부르사오니
진심 감사하나이다.


길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서도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그 노래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자 생명의 노래였다. 호송원들도 눈치가 있어서인지, 주변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타미에서 바라본 아지로 항

“아가씨. 여기에서 잠시 쉬어가시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직은 이른 춘삼월이지만 언덕길을 오르던 가마꾼도, 줄리아도 헉헉 댔다.

“아가씨! 저기 저 바다위에 섬이 하나 보이시지요?”
“네. 보입니다. 안개 속의 저 섬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저기로 유배를 가시는 것입니다.”

짧은 대화 후 다시 가마는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지로 항구에 다다르자 줄리아는 자신을 따르면서 찬송가를 불러준 군중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배에 오르기 전 기모노를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서 남루한 옷차림의 한 여인에게 기모노를 주었다.

“이 기모노를 받으세요. 저에게는 필요 없는 사치품입니다. 깨끗하게 입었으니 조금만 손질 하시면 새 옷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비싼 천이군요. 잘 입겠습니다.”

줄리아는 배에 오르기 전 고해성사를 하려고 했으나, 신부가 없어서 어느 대리인을 통해서 했다.

“신앙을 위한 유형은 일종의 순교입니다. 거기서 죽더라도 진실한 순교입니다. 그것을 위한 증명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줄리아는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기도는 <성수기도>였다.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주 예수님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녀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결국 줄리아는 기도하면서 유배 길에 올랐다.

주의 계명 깊이 새겨 바른길로 나가리다.
주여, 세상 풍파 중에 우리 보호 하옵소서.
하느님 백성 된 우리 주님께 의탁하오니
영원 상속 주옵소서.


화려함이 넘치고 권능의 빛을 발했던 줄리아-

아지로 부두

필자는 얼마 전 뜨거운 여름날. 그녀의 발자취를 더듬어 아지로(網代)를 다녀왔다.
작은 어촌. 보잘 것 없는 항구였으나,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파도속에 그녀의 거룩한 정절이 함께 일렁이는 듯했다.

<본문 중 성가(찬송가)는 필자가 임의로 삽입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다름>
<참고자료 : 모리 노리코(森禮子)의 '三彩의 女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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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