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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르포]눈엔 보이지 않는 이 물질이 '스파이더 범죄'를 잡아낸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은평구 갈현2동의 5층짜리 다세대주택. 보호작업복을 입은 한 남성이 장갑을 끼고 가스관에 무언가를 발랐다. 약 5분에 걸친 작업이 끝났지만 가스관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여성이 가스관에 자외선 조명을 비추자 반전이 일어났다. 작업자의 손이 스쳐간 자리가 연두색 빛을 발했다. 작업팀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지난 14일 정인환씨가 작업복을 입고 서울 은평구의 한 다세대주택 가스관에 특수형광물질을 도포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난 14일 정인환씨가 작업복을 입고 서울 은평구의 한 다세대주택 가스관에 특수형광물질을 도포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의문의 물질은 특수조명을 비추면 색깔이 드러나는 ‘특수형광물질’이다. 세 명의 작업자는 정인환(38)씨와 이혜림(30) 서울 은평경찰서 생활안전과 경사, 류경애(49)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주무관이다. 
 
세 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스파이더 범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스파이더 범죄’는 주로 여름 휴가철에 주택의 가스관 등을 이용해 거미처럼 벽을 타고 침입하는 범죄를 말한다.   
 
서울은평경찰서 이혜림 경사가 14일 형광물질이 도포된 가스관의 일부를 특수조명으로 비춰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서울은평경찰서 이혜림 경사가 14일 형광물질이 도포된 가스관의 일부를 특수조명으로 비춰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 형광물질이 스파이더 범죄를 퇴치할 수 있는 건 독특한 특징 때문이다. 물질을 바르기 전엔 흰색 페인트처럼 생겼지만, 바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효과는 도둑이나 강도가 만지거나 밟았을 때 나타난다. 만지면 끈적이지 않는 물질이 손과 발자국에 남아 지문과 족적 채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의 몸이나 옷에 묻으면 물에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경찰이 특수조명으로 사람들을 비춰 형광물질이 묻어있는지 확인하는 식으로 용의자를 가려낼 수 있다. 곧바로 범죄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력한 정황 증거가 되는 것이다.    
  
특수형광물질은 바르기 전엔 흰색 페인트와 비슷하다. 김경록 기자

특수형광물질은 바르기 전엔 흰색 페인트와 비슷하다. 김경록 기자

 
서울시는 지난 6월 초부터 17개 자치구 18개 구역의 다세대주택 3600곳에 이 물질을 도포했다. 주로 1층의 가스관·창문, 에어컨 실외기 등에 발랐다. 
 
류 주무관은 “이 물질은 마치 도장 인주처럼 한 번 만지면 다른 곳에 여러 번 전이된다. 범인이 1층에서 만지거나 밟은 채 윗층으로 올라가면 계속 묻어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범행 증거를 흘리게 되는 것이다.
 
도포 비용은 한 주택 당 3만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한 번 발라두면 눈이나 비에도 6개월~1년 가량 효과가 지속된다. 시는 이 물질이 도포된 구역의 지구대엔 특수조명을 한 개(26만원)씩 배포했다.  
 
시가 가정집에 특수물질까지 바르게 된 건 여름 휴가철이면 침입 절도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17일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7~9월 발생한 절도(침입절도 포함)는 1만2285건으로 전체(4만6860건)의 26.2%였다. 
 
특히 창문을 열고 생활하는 여름엔 스파이더 범죄의 위험성은 높아진다. 경찰은 특수물질 도포 구역을 우범 지역 위주로 선정했다.  
 
정인환씨가 끼고 작업한 장갑에 특수조명을 비추자 형광색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김경록 기자

정인환씨가 끼고 작업한 장갑에 특수조명을 비추자 형광색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김경록 기자

 
갈현2동 약 1.2km 이르는 구간에는 다세대주택 200여 곳이 밀집해 있었다. 오후 9시가 넘자 어두워진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다세대주택 주변엔 폐쇄회로(CC)TV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방범창이 없는 창문들이 눈에 띄었다. 창문 바로 밑에 낮은 담벼락이나 에어컨 실외기가 있어 접근이 쉬운 범죄취약 지역이다.  
 
범인이 스파이더 범죄를 저지르다 특수형광물질을 밟으면 형광색 족적이 남게 된다. 김경록 기자

범인이 스파이더 범죄를 저지르다 특수형광물질을 밟으면 형광색 족적이 남게 된다. 김경록 기자

 
서울시와 경찰은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다세대주택 200여 곳에 특수형광물질을 발랐다. 이 경사는 “한 주택이 침입자에게 뚫리면 일대 구역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져 구역 전체 도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이 지역의 침입범죄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무색·무취의 특수물질을 바르는 작업은 간단치만은 않다. 동네 주민들이 “도대체 무슨 작업을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항의하는 일도 생긴다. 작업자는 한여름에도 보호복을 입고 작업해야 한다. 몸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 물질의 특성 탓이다. 작업자 역시 이 물질이 잘 발라지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씨는 “가스관이나 창문에 쌓였던 먼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잘 발라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혜림 경사가 14일 형광물질이 도포된 창문의 방범창을 특수조명으로 비춰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혜림 경사가 14일 형광물질이 도포된 창문의 방범창을 특수조명으로 비춰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영국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침입범죄 예방을 위해 특수물질을 도포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 방식을 2015년 5월부터 벤치마킹하고 있다. 지금까지 18개 자치구 51개 구역의 다세대주택 8600곳에 이 물질을 도포했다. 국내에선 2012년 무렵부터 이 물질이 개발돼 경찰청 과학수사대가 지문 채취용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시는 도포된 구역엔 경고문을 부착한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2015~2016년 이 물질이 도포된 지역의 침입범죄 발생률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상반기보다 올해 상반기에 27.6% 감소했다. 서기용 서울경찰청 생활안전계장은 “특수형광물질을 바른 곳에 경고문을 부착하는데, 범인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돼 범죄예방 효과를 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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