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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희의 구문자답(九問自答) 열 살 때 체한 돼지고기가 아직도 뱃속에 있어요

기자
강영희 사진 강영희
트라우마 또는 정신적 외상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세월호와 관련된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사회적인 트라우마로 공유되는 세월호 참사의 경우, 사회 개별 구성원들의 삶과 공동체 현실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오랫 동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는 몸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삶 전반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이 겪은 트라우마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스트레스와 충격, 상처를 받지만,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특히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내기는 어렵다. 같은 사건을 함께 겪었다 해도 개인에 따라 특정 사건에 대한 감응도가 다를 뿐 아니라, 불편한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무의식적 노력이 작용하여 기억을 지우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특정한 정신적 육체적 증세를 불러온 트라우마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소멸시킬 수 있다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야기된 심신의 증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는 몸에 기억된다. 달리 말하면 상처는 무의식에 기억된다.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무의식의 존재를 밝혀냈고,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집단 무의식이 신화를 통해 전승됨을 밝혀냈으며,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은 무의식을 인간의 욕망으로 해석하고 이것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구문자답의 방법론은 이들 무의식 삼걸을 사숙한 토대 위에서 시도되었다. 구문자답에서는 무의식, 꿈, <스토리텔링=구조화된 이야기>를 통해 치유를 시도한다. 하지만 구문자답의 방법론은 이들 가운데 누구의 것과도 다르다. 구문자답에서는 무엇보다 공감(共感) 또는 공명을 토대로 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며, 여기에는 대체로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동반된다.
 
칠십 대의 노신사가 구문자답을 찾았다. 훤칠한 외모를 지닌 거구의 어른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가서 존경심마저 품으며 조심스레 마주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고, 평생 소화가 되지 않아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며 뜸자리로 가득한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부터는 허리마저 아파 몸을 가누기 힘들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손을 맞잡고 마주 앉아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그분의 무의식 속에서 해당 증세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읽어냈다.
 
시원한 여름날 마을 한복판의 큰 나무 아래서 돼지를 잡아 굽고 있었다. 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언제나 배가 고팠던 사내 아이는 화덕 옆을 한시도 떠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고기를 먹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맛난 음식은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정신 없이 고기를 먹던 아이가 배를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가난한 피난민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여유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는 평생토록 아픈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만 했다.
 
어린 시절 온 식구가 피난을 갔다가 얼결에 정착한 시골 마을에서 배를 곯던 아이는 마을 잔치에서 허겁지겁 얻어먹은 돼지고기에 체했고, 밤새도록 배앓이를 했으나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을 체한 채 살아왔고, 그것은 허리가 심하게 결리는 증세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이다..
몸 속에 배아픈 어린 사내 아이를 데리고 살아가는 노신사는 지금도 끊어질 듯이 배가 아픈 환상을 종종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사람은 없다. 아이는 혼자 배를 쓸고, 혼자 신음 소리를 내고, 혼자 눈물을 흘린다. 노신사는 여전히 아픈 배를 틀어쥐고 뒹구는 어린 사내 아이다.
 
노신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장면을 하얀 백지 위에 그려보시겠어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노신사는 슥슥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뿌연 스케치 한 장을 그려냈다. 어쩌면 미루나무일 수도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지우개로 문지르다가 미처 지우지 못한 듯한 필치로, 돼지고기 화덕과 배를 잡고 구르는 사내 아이의 모습을 담아냈다. 뿌연 크로키처럼도 보였다가 선명한 사진처럼도 보였다. 평생을 잊지 못하고 수천 번을 반추하던 장면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내가 직접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스윽 친구네 집으로 들어가듯이 쓰윽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린 사내 아이가 되었고, 내가 배가 고팠고, 내가 돼지고기를 미친듯이 먹었고, 내가 체해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걸 지켜보던 노신사의 입에서 그윽 그윽 수천 번의 트름이 올라왔다. 동시에 내 입에서도 끄윽 끄윽 수천 번의 트름이 올라왔다. 마침내 우리의 제의(祭儀)는 끝났고, 노신사와 나는 마주보고 빙그레 웃었다. 다시 물어볼 것도 없이, 나는 노신사가 다시는 배앓이를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평생을 남몰래 간직한 선명한 이미지. 트라우마의 기억.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이 있다. 그것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로 남을 것인가 외상후 성장(Post Traumatic Growth)으로 이어질 것인가, 답은 오직 이에 대해 다른 누군가와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적확(的確)한 공감을 나눌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활짝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그의 인생을 훌쩍 한 걸음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멋진 성숙으로 이어질 것이다. 당신 몸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올릴 수 있는 행복한 반전이 가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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