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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문재인 대통령은 더 ‘타락’해도 좋다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에선 한 주를 시작하는 수석·보좌관회의는 오후 2시에 열린다. 집권 초기에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왜 이러고 있을까.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이 월요일 아침에 회의를 하면 전날인 일요일에 쉬지 못한다면서 결정한 것”이라며 “아직은 일요일에도 점심 무렵께 출근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요일 휴무가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비서실장을 지냈다. 새벽에 일어나 조찬회의를 하고 늦게 자는 일이 반복됐다. 늘 ‘한계 용량’을 초과했고, 회의 도중 졸음이 밀려오기 일쑤였다. 알레르기 치료약을 먹었던 문희상 비서실장과 술자리가 많았던 유인태 정무수석·정찬용 인사수석도 자주 졸았다. 그는 “단둘이 대화를 나누다 깜빡 졸음에 빠진 적도 몇 번 있었다”고 고백했다. 청와대 근무 첫해에 체중이 10㎏이나 붇고 혈압이 올랐다. 이를 10개나 뽑고 임플란트 수술을 받았다. 월요일 오후 회의는 참모의 노동 강도를 잘 아는 대통령의 인간적 배려의 결과였던 것이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취임 두 달이 넘도록 80%를 넘기고 있는 비결은 이렇게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 배려와 소통의 리더십에 있다. 대통령 집무실을 비서들이 근무하는 여민관(與民館)으로 옮긴 것도 소통에는 최고의 처방이었다. 수석비서관들은 급하면 3층으로 올라가 대통령과 즉석 토론을 벌이는데 대통령의 의견을 바꾸기도 한다. 대통령은 윤영찬 국민소통 수석의 방으로 전화를 걸어 받지 않자 임종석 비서실장 주재 회의가 열리고 있는 2층 회의실로 찾아간 적도 있다. 청와대 관람객들을 향해 집무실 유리창을 열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며 손을 흔들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권력 의지가 약해서 참모들에게 끌려다닐 것이라는 우려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참모들이 대통령을 만나려면 비서동에서 500m나 떨어져 있는 본관까지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대착오적 장면은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 당일 안보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상황 보고서를 관저와 집무실의 문고리 권력에게 동시에 전달했던 코미디도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예외적으로 높은 지지율은 절대 공짜가 아니다.
 
 
타고난 원칙주의자인 문 대통령이 타협을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국민의당을 향한 ‘머리 자르기’ 발언으로 촉발된 추경 무산 위기를 임종석 비서실장의 대리사과로 수습한 장면은 상징적이다. ‘인사와 추경은 별개’라는 ‘나의 원칙’보다는 ‘민생을 위한 현실 정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사고의 전환일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원조 보수’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를 활용하자는 건의를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수용한 것도 신선한 결단이었다. 그레이엄을 설득했던 김장환 목사는 “나는 2번(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을 찍었지만 나라를 위해 문 대통령을 도왔다”고 했다. 국익을 위해 진보와 보수가 하나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인태 전 의원은 방송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이)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는데 요즘은 좋게 말하면 상당히 융통성이 생긴 거고, 어떤 면에선 옛날보다 좀 타락한 것도 같고…”라고 애정 어린 조크를 했다. 문 대통령은 더 융통성을 발휘하는 ‘타락’을 마다해선 안 될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120석짜리 정당으로 국정을 끌고 가려면 야당과의 협치와 타협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사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 때 집권 세력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용섭씨를 참여정부 초대 국세청장으로 발탁하는 데 앞장섰다. 사정비서관에는 “그 중요한 자리에 왜 우리 쪽 사람을 안 쓰느냐”는 강력한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옷로비 사건 특검보였던 양인석 변호사를 기용했다. “이념적 성향은 물론 당선인 인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공직기강비서관에는 인사 검증 결과를 직속 상급자인 자신에게도 사전에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공사 구분이 엄격한 이석태 변호사를 기용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된 지금도 ‘우리 사람’만 쓰겠다는 고집과 ‘나만 옳다’는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인사 검증 과정에서 허점이 많았던 것도 ‘우리 편’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내 편 네 편을 가르다 청와대 캐비닛에 ‘블랙리스트’를 남기고 떠난 박근혜 정권의 말로를 잊어선 안 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본래의 심성을 잃지 않되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흘러가야 한다. 좀 더 융통성 있는 ‘타락’한 대통령이 멀리 가는 물이 되고, 민생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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