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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광호의 꿀성대에 젖어드는 시간

마법처럼 장면이 바뀌는 값비싼 기계설비도, 프랑스 현지에서 찍어온 화려한 영상도 없다. 가슴 찡한 인생 이야기와 아름다운 노래만 있다. MSG라고는 한 스푼도 넣지 않은 순도 100%의 뮤지컬을 오랜만에 만났다. 지난주 막을 올린 뮤지컬 ‘시라노’ 얘기다. 올들어 대극장 뮤지컬 신작이 가뭄이라 기다림이 길었다. 톱배우 류정한이 데뷔 2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이라 더욱 화제가 됐다.  
 
“40대 후반이 되니 주위를 둘러보며 뭔가 줄 수 있는 것을 찾게 됐다”는 류정한은 “대단한 메시지를 주는 작품은 아니지만 사랑 이야기 안에 희망과 위로를 담아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가창력 갑’으로 꼽히는 홍광호·김동완과 트리플로 직접 시라노로 나선다. 최근 남자 배우들의 개런티 인플레이션 탓에 흔히 볼 수 없었던 호화 캐스팅에 ‘지킬앤하이드’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까지,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이 아닐 수 없다.  
명배우 제라르 드 파르디외가 열연했던 동명 영화(1990)의 그 ‘시라노’가 맞다. 원작인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897)는 발표 직후 바로 연극으로 제작돼 300일 연속 공연되며 ‘프랑스 최고 연극’에 등극했고, 한 세기 넘게 연극은 물론 오페라, 영화, 발레 등 다양한 장르로 꾸준히 재생산되어 온 스테디셀러다.  
 
유독 뮤지컬화는 드물었다. 제라르 드 파르디외의 영화 성공 이후 90년대 네덜란드와 일본에서 제작됐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2009년 일본 굴지의 극단 ‘토호’가 아카데미상 수상 작가 레슬리 브리커스·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 콤비와 함께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번 공연은 일본에서 대본만 가져온 논레플리카 라이선스 방식으로, 일본 프로덕션보다 음악과 드라마를 강화했다.  
 
17세기 중엽 프랑스. 뛰어난 검객이면서 문학적 재능도 뛰어난 시인이자 극작가인 시라노는 크고 못생긴 코가 콤플렉스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괴팍한 성격이지만 콤플렉스 탓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러브레터를 대필해주며 그녀의 사랑을 도와주는 슬픈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시라노의 이지적인 말솜씨와 화려한 문장력을 발휘하기엔 연극 무대가 제격이라 그간 수없이 무대에서 재해석돼 왔다. 그럼 뮤지컬 버전만의 매력은 뭘까. 대극장 스케일에 걸맞는 특별한 무대 메커니즘이나 연출적 장치로 객석을 홀리지 않을까.  
 
틀렸다. 애초에 ‘시라노’엔 자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원작부터 대극장에서 선호하는 스릴러도 아니고, 수퍼히어로가 날아다니는 액션도 없다. 선과 악을 오가는 두 얼굴의 사나이도 없고, 흔한 악당 하나 나오지 않는다. 전쟁 상황에도 스펙터클한 추격전이나 칼싸움은 보기 힘들고, 그렇다고 놀랄만한 반전이 숨겨진 것도 아니다. 평생 말하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이 그저 잔잔하게 흘러갈 뿐이다.  
 
무대는 이 ‘어른을 위한 동화’를 고스란히 펼쳐 놓는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파리의 연인’ 등에서 서정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구스타보 자작 연출은 이번에도 시적인 무대로 승부했다. 철골 뼈대로 아웃라인만 표현한 세트에 짙은 조명으로 색감을 입힌 무대는 마치 펜으로 그린 그림 동화책 속에 들어온 듯 배우들을 온화하게 감싸고, 배우들은 이 그림같은 세트를 스스로 밀고 당기며 페이지를 넘겨 간다.  
 
특별히 눈길을 뺏는 장치가 없다보니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가 더욱 도드라진다. 뮤지컬 넘버들이 주인공에 집중되는 편이라 홍광호의 ‘꿀성대’를 간만에 유감없이 만끽하는 호사도 누렸다.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구걸하듯 살지 않겠다”며 “내 영혼만은 영원히 숨쉬리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리라”고 굳은 신념을 노래하는 시라노의 솔로 ‘브링 미 자이언츠’는 ‘맨오브라만차’의 ‘이룰 수 없는 꿈’이나 ‘지킬앤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처럼 마음에 깊숙이 꽂힌다.  
 
왕권 강화를 위해 예술가의 재능을 규범 안에 통제했던 17세기 프랑스에서, 귀족이 좋은 극장에 작품을 올려주겠다 회유해도 “당신이 내 작품 토씨하나 건드릴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단호히 맞서는 시라노는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 “지금껏 ‘맨오브라만차’를 가장 사랑했지만 그보다 더 사랑하는 작품이 될 것 같다”던 류정한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다.  
 
온갖 자극적인 조미료에 길들여진 탓에 이 클래식한 무대가 다소 심심하고 올드하게 와닿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절제된 연출은 좋은 원작을 빛나게 하는 법. 기교 부리지 않고 묵직하게 정면승부로 전하는 진실한 사랑 이야기에 메말랐던 가슴에도 단비가 내렸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건 결국 사람이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프로스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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