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기자
장상인 사진 장상인
-일본 시즈오카(静岡)의 역사 산책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德川家康 公)이 사랑했던 시즈오카입니다.”

시즈오카역(静岡驛) 북쪽 출구 시즈오카 시립 미술관 건물의 유리벽에 쓰여 있는 글이다. 유리벽 글에 눈을 맞추고 걸어가면 작은 동상과 만난다. 다름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의 동상이다.

이 역은 신칸센(新幹線)과 일반 기차, 시즈오카 현(縣) 각지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함께 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늘 북적인다.

필자는 지난 주말 역(驛) 앞 광장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시즈오카 역사 산책을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슨푸성(駿府城) 공원이었다. 슨푸(駿府)는 시즈오카의 옛 이름이다.

슨푸성(駿府城) 공원을 찾아서

후지산(富士山)을 타고 내려온 바람 때문인지 30도 가까운 무더운 날씨였으나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내 지도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목적지와의 퍼즐을 맞췄다. 그러나, 안내 지도로는 방향을 정확하게 잡을 수가 없었다. 고맙던 바람이 심술을 부려 서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일본인들을 붙들고 도움을 청했다. 질문보다는 답이 더 길게 이어지는 과잉친절(?)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었다.

또 다른 도우미. 성터와 인접해 있는 높은 시즈오카 현청 건물이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시즈오카 역에서부터 도보로 20여 분만에 길게 이어진 슨푸성의 성벽을 찾았다. 이곳은 다른 성(城)에 비해 해자(垓子)가 넓은 것이 특징이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자는 굴강(掘江)·외호(外濠)·성호(城濠)라고도 한다.

슨푸성의 해자

유난히 견고해 보이는 돌담아래의 해자에는 커다란 잉어들이 유유자적(悠悠自適) 놀고 있었다. 해자를 따라 성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건된 슨푸성의 다쓰미 망루(櫓)가 눈에 들어 왔다. 일본인들이 ‘야구라(櫓)’라고 하는 망루는 방어용 내지는 감시용 건물이다. 성(城) 동문 입구에 쓰여 있는 빛바랜 안내문을 요약해서 옮겨 본다.

다쓰미 망루

<슨푸성은 외굴·중굴·내굴 3중의 굴(掘)을 가지고 있는 윤곽식 평성(平城)이다. 혼마루(本丸)를 중심으로 회자형(回字形)에 니노마루(二ノ丸) 산노마루(三ノ丸) 순으로 배치되어 중앙의 혼마루의 북서각(北西角)에는 외관 5층 내부 7층의 천수각이 있었으나 1635년 소실(燒失)되었다.
슨푸성이 성곽으로서의 형태를 드러낸 것은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德川家康 公)이 축성을 개시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에도(江戶) 막부를 열었던 이에야스 공이 1607년 장군을 은퇴하고 슨푸에 이주하였기 때문에 천정기(天正期, 1573-1592)의 슨푸성을 천하보청(天下普請)으로서 확장 및 개축했다. 당시의 슨푸성은 에도와 함께 정치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하보정(天下普請)은 에도 막부가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에게 명령하고 행한 토목공사로서 성곽은 물론 도로 정비와 하천 공사 등 인프라(infra) 정비의 공사를 일컫는다.

안내문에 쓰인 대로 슨푸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는 셋째 아들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1632)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은퇴했다.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막후에서 조종했던 것이다.

동문을 지나자 군데군데 역사의 흔적들이 남이 있었다. 성이라기보다는 공원의 분위기가 더욱 짙었다. 시즈오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한 셈이다.

필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상으로 갔다. 나무들에게 둘러싸인 동상은 천수각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시즈오카 역 앞 광장의 동상과는 달리 표정이 근엄했다. 손에는 매 한 마리가 있었다.

이에야스의 동상

동상 옆에는 이에야스가 심었다는 귤(橘)나무가 있었다. 나무 역시 시즈오카 현 지정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었다. 가지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나무에서도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에야스가 심은 귤나무

호랑이 해, 호랑이 날, 호랑이 시에 태어난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542년 12월 26일 나고야(名古屋)의 오카자키(岡崎) 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다케치요(竹千代)였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 1907-1978)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서 그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성주님! 오카자키(岡崎)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내아이가 아닙니다.”
“뭐? 보통 사내아이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출생 시각은 오늘 새벽 인시(寅時). 아이가 호랑이 해, 호랑이 날, 호랑이 시(時)에 태어나시었다며 오카자키 성에서는 일시에 환성이 터졌다고 합니다.”
“허어. 호랑이해에, 호랑이 날, 호랑이 시(時)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태어난 이에야스(家康)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6살 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버지인 노부히데(信秀)에게, 8세 때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인질로 슨푸에서 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어쩌면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빌어서 알아본다.

“다케치요(竹千代)!”
아버지 히로타다(廣忠)가 비장한 음성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버님.”
“너는 아직 어려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네가 집을 떠나 인질로 가는 것은 우리 가문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대한 일이다.”
“네. 잘 알겠습니다. 아버님!”
“아비인 내가 무력함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이렇게 너에게 머리를 숙였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다오. 네가 성장했을 때 반드시.....”

<아버지 히로타다는 말을 맺지 못하고 아들 다케치요 앞에 머리를 숙이더니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인질 생활은 19살 때 겨우 풀려났다. 그 때가 바로 1560년(永禄 3年)이다. 오케하지마(桶狹間)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전사하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질 기간이 오히려 그의 인격 형성에 있어서 밑거름이 됐다. 그가 슨푸에 있는 사찰 린자이지(臨濟寺)의 주지 스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야스(家康)가 지금의 시즈오카인 슨푸를 사랑하는 이유가 충분히 있었는 것이다. 아주 많이.

어린 시절 인질이 오히려 약이 되다

이에야스는 어릴 적 아버지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던 모습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또 새겼다. 후일 최고 권력자가 될 때까지 아버지의 말을 고이 간직했던  것이다. 필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이에야스가 남긴 유훈 비(碑)와 만났다. 나고야의 오카자키(岡崎) 천수각 입구의 동조공유훈비(東照公遺訓碑)에 새겨져 있는 글과 같은 내용이었다. 오늘 날도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이글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었을 때 쓴 것이다.

이에야스가 남긴 어록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부자유를 늘(常)이라고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바람(望)이 일면 곤궁한 때를 떠올려라. 감인(堪忍)은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기본. 분노를 적이라고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있다가 지는 것을 알지 못하면 몸에 해가 된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탓하지 말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침에 이기나니.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한다. 풀잎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노라.>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인생인데 사람들은 왜 이토록 서두르는 것일까. 풀잎의 이슬도 무거우면 이파리에서 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하찮은 것이라도 매사가 지나치면 아니 될 것이다. 

시즈오카의 역사 산책은 시작부터 큰 울림이 있었다(계속).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