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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옳으면 반대 뚫고 불굴의 질주, 통일외교 길 보여주고 떠난 콜

1990년 독일 본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왼쪽)과 만년필을 교환하는 콜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1990년 독일 본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왼쪽)과 만년필을 교환하는 콜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헬무트 콜은 평범한 정치인이었다. 독일 시사잡지 데어 슈피겔은 그를 “본의 얼간이”라고 조롱했다. 그가 1969~82년의 빌리 브란트-헬무트 슈미트의 사민당 정권의 뒤를 이어 기민-자민당 연립정부의 총리에 취임했을 때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버려지고 반통일적인 반동정책이 추진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콜은 동방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불굴의 통일외교로 주변국 모두가 반대하는 동서독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콜은 다음 선거만 생각하는 정치인(politician)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정치가(statesman)의 반열에 올랐다.
 
통독 에 결정적 거부권을 가진 것은 소련이었다. 그래서 69년 집권한 빌리 브란트도 이듬해 사실상의 독소불가침조약인 모스크바조약부터 체결했다. 브란트와 콜, 그들의 탁월한 외교참모들인 에곤 바와 호르스트 텔칙은 “독일 통일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다”는 현실인식을 공유했다. 통일외교도 거기에 맞췄다. 콜이 돌파해야할 통일의 최대 관문은 통일된 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잔류문제였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통일독일의 나토 탈퇴를 주장했다. 그것은 콜이 그리고 있던 유럽통합의 큰 그림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유럽 속의 통일을 원했다.
 
서방진영에도 통일의 적은 있었다. 영국의 대처 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마자 모스크바, 바르샤바, 워싱턴으로 동분서주하면서 독일통일 반대론을 확산시켰다. 특히 대처의 반대가 완강했다. 콜의 통일외교는 미국 대통령 조지 H.W. 부시 설득에서 시작했다. 고르바초프와 냉전종식을 공동선언한 데 자부심을 가진 부시는 독일통일을 지지하고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에게 영국·프랑스·폴란드, 심지어 소련 설득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2004년 독일에서 선거 유세에 나선 콜. [AP=연합뉴스]

2004년 독일에서 선거 유세에 나선 콜. [AP=연합뉴스]

콜의 통일외교가 얼마나 세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화가 있다. 90년 7월,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G7정상회담. 콜이 경제 파탄과 크렘린 내 보수파의 반발에 입지가 흔들리는 고르바초프 구하기에 혼신의 힘을 쏟는 자리였다. 콜은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어머니가 회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중요한’ 말을 들었다. 콜은 베이커의 어머니에게 7명의 대통령과 총리들이 서명한 편지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이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베이커의 어머니는 그 편지를 액자에 넣어 보관했다. 콜은 호텔~회의장도 전용차가 아닌 시내 버스로 왕래했다. 한국의 통일외교를 담당할 대통령과 외교부장관도 이 정도의 창의성과 순발력, 열정은 있어야 할 것이다.
 
89년 6월이면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누구의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때다. 콜은 고르바초프와 함께 본의 라인강변을 걸었다. 고르바초프가 불쑥 물었다. “1989~90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식량부족 사태가 오면 도와줄 수 있겠소?” 콜은 즉석에서 “그러지요(Ja!)”라고 대답했다. 그해 콜 정부는 2억200만마르크 상당의 쇠고기 통조림, 돼지고기·버터·분유·치즈·구두·기성복을 보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겨울나기를 도왔다. 콜의 직관은 고르바초프의 도움 요청의 시기적절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87년 동독을 방문해 호네커 총리를 만난 콜(오른쪽). [AP=연합뉴스]

87년 동독을 방문해 호네커 총리를 만난 콜(오른쪽). [AP=연합뉴스]

되돌아 보면 콜의 그런 정성이 고르바초프의 마음을 녹였다. 90년 7월 고르바초프와 콜은 모스크바에서 통일독일의 나토 잔류문제에 관해 평행선을 긋는 회담을 마치고 고르바초프의 고향인 카프카스로 날아갔다. 두 사람은 카프카스 산 속 고르바초프의 소박한 별장에서 마주 앉았다. 고르바초프는 개구일성, “통일독일은 나토에 남아도 좋소!”라고 선언했다. 놀란건 콜과 외무장관 디트리히 겐셔였다. 그렇게 독일통일의 마지막 문이 열렸다. 90년 7월 콜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서독 마르크의 1대1 교환을 통한 화폐통합을 결단하여 통일여정의 마지막 한 걸음을 뗐다.
 
‘독일통일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콜은 통일외교에는 전체를 꿰뚫는 전략, 굴러 온 기회를 잡아채는 직관과 순발력, 주위의 반대가 있어도 옳은 방향이면 질주하는 과단성이 필요하다는 소중하고 고마운 교훈을 한국에 선물로 주고 87세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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