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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독일 통일 이끌고 유럽 통합 설계 … 세계사 전환 이끈 헬무트 콜

헬무트 콜 1930~2017 
통독 한 달 전인 1990년 9월 4일 동독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콜 전 총리. [AFP=연합뉴스]

통독 한 달 전인 1990년 9월 4일 동독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콜 전 총리.[AFP=연합뉴스]

그는 독일 통일의 아버지이며, 유럽 통합의 설계자였다. 오늘날 유럽의 모습은 그의 머리 속에서 그려졌고, 그의 손으로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유럽의 정치인 중 한 명인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16일(현지시간) 타계했다. 87세. 이날 독일 언론은 “콜 전 총리가 루드비히스하펜 인근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가 평생 몸담은 기독민주당은 “슬픔에 빠졌다”고 짧고 굵게 애도를 표했다.
 
87년 독일 북부의 독일군·영국군 주둔지를 방문한 콜. [로이터=연합뉴스]

87년 독일 북부의 독일군·영국군 주둔지를 방문한 콜. [로이터=연합뉴스]

역대 최장수 총리로 16년간 재임하면서 콜 전 총리는 세계사의 대전환을 이끌었다. 193cm에 이르는 거구로 좌중을 압도했던 그는 때로 강력히 원하는 바가 있으면 “쑥대밭을 만들 수 있다(could be an elephant in a china shop)”면서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구상을 관철시켰다.
 
콜 전 총리는 1930년 라인란트 지방 루드비히스하펜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지낸 유년 시절은 참혹했다. 10대 소년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이웃의 시신을 수습했고, 패전 직후엔 배를 곯아가며 두 달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독일의 슈피겔은 이런 경험이 콜 전 총리를 정치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봤다. “콜이 어렸을 때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면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쟁은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 않다.”
 
85년 본에서 열린 세계경제회의에 참석해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EPA=연합뉴스]

85년 본에서 열린 세계경제회의에 참석해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왼쪽)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EPA=연합뉴스]

그는 늘 남보다 앞서나갔다. 그의 이력은 무수한 최연소 타이틀로 채워졌다. 16세에 최연소로 기독민주당에 입당했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역사학·정치학을 공부한 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30세 땐 최연소로 기민당의 라인란트팔츠주 대표가 됐으며, 39세엔 최연소로 라인란트팔츠 주지사가 됐다. 82년엔 52세 나이로 서독 총리에 올랐다. 이 역시 2005년 앙겔라 메르켈이 51세에 총리가 되기 전까지 최연소 기록이었다.
 
취임 후 그가 맞이한 독일의 80년대는 황금기였다. 패전을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고, 국제 무대에서 경제적·정치적 패권을 회복했을 때였다.
 
안정적인 국내 정치는 콜 전 총리의 시야를 외부로 확장시켰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는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됐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은 단일 통화시장과 유럽 통합의 토대를 다졌다.
 
더불어 통일 작업도 시작됐다. 87년엔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과의 역사적 만남이 성사됐다. 본격적인 동·서독 데탕트의 출발이었다. 자신이 속한 기민당이 오랫동안 반대해 온 유화 정책이었지만 콜 전 총리는 속전속결로 통일을 추진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만나 동독 주둔군 철수를 요청했다. 소련군 35만 명이 복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모두 서독 정부가 부담했다.
 
제국주의 독일의 부활을 두려워한 일부 국가들이 독일 통일에 반대했지만 콜 전 총리는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우리 독일인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하며, 국제사회의 언제나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거듭 안심시켰다.
 
2000년 통독 10주년 행사에서. 왼쪽은 그를 정치적 스승으로 꼽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로이터=연합뉴스]

2000년 통독 10주년 행사에서. 왼쪽은 그를 정치적 스승으로 꼽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로이터=연합뉴스]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10월 독일은 공식적으로 하나가 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생일대의 과업을 완성한 뒤 콜 전 총리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통일 비용이 문제였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지만 그가 약속했던 것들은 이뤄지지 않았다. 직업을 잃고 서독으로 떠밀려 와 빈민으로 전락한 동독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동독 경제의 파탄은 독일 전체를 흔들었다. “총리가 권력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지율은 급락했고, 98년 16년간 지켜 온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자택 앞에 추모의 꽃과 양초, 유럽연합(EU)기가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그의 자택 앞에 추모의 꽃과 양초, 유럽연합(EU)기가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시련은 거듭됐다. 99년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져 쫓겨나다시피 정계를 떠나야했다. 2001년엔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2008년 비서였던 35세 연하의 마이케 리히터와 재혼했지만, 리히터가 노쇠한 콜 전 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스캔들이 잦아들고서야 명예회복이 가능해졌다. 2011년엔 국제관계에 기여한 공으로 ‘헨리 키신저 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엔 그의 공로를 기리는 우표가 발행됐다. 연방정부가 발행한 우표는 ‘통일의 총리, 유럽의 명예시민’이라는 문구로 그를 재평가했다.
 
슈피겔은 “세상에 완벽한 총리는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독일과 유럽의 통합에 있어서 콜은 위대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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