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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원 내고 타임머신을 타다

한옥이 듬성듬성 섞여있는 경북 경주 서악동 주택가에 족히 몇 백 년은 돼 보이는 전통건축물 하나가 있다. 문을 조심스레 열어 젖히니 머리에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갖춰 입은 여행객들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안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문턱 하나만 넘으면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이곳은 첨성대에서도 멀지 않은 서악서원이다. 민속촌이나 사극 세트장이 아니라 ‘경상북도 기념물 제 19호’로 등록된 진짜 ‘문화재’ 말이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이었던 향교와 서원은 전국에 400여 곳 남아 있다. 일부는 전통문화 체험 공간으로 활용된다. 경주 서악서원에서 진행되는 선비체험.

조선시대 교육기관이었던 향교와 서원은 전국에 400여 곳 남아 있다. 일부는 전통문화 체험 공간으로 활용된다. 경주 서악서원에서 진행되는 선비체험.

서악서원이 자리잡은 경주 서악동 전경. 

서악서원이 자리잡은 경주 서악동 전경.

지난 6월 10일 오후 3시. 서원 앞마당에 모여 일단 유복으로 갈아입으니 다양한 조선 체험이 시작됐다. 옛 유생처럼 모여앉아 공부도 했다. 
“서악서원은 1561년 경주 사대부 이정이 세운 사립학교입니다. 조선 16대 왕 인조가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조선시대 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권위를 인정받은 사원)이기도 하죠.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어요. 전국 600여 개의 서원이 문을 닫는 와중에도 서악서원은 굳건히 살아남았습니다. 건물은 화재로 불타버려 1600년 재건한 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
이정희(54) 문화해설사가 공자왈 맹자왈 대신 서악서원의 역사와 유래를 조곤조곤 풀어냈다. 이 해설사의 강의가 진행된 곳은 서악서원 현판이 걸린 시습당인데, 조선시대 유생은 이 자리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친구와 교류했다. 그 옛날 선비가 생활했던 장소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평생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유생 복장을 입어서인지 품행도 절로 방정해졌다. 
조선시대 서원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기도 했다. 서악서원 역시 시습당 뒤편에 서악서원이 기리는 신라 문장가 설총·최치원, 신라 장군 김유신의 위패를 모신다. 시습당의 왼편과 오른편에는 유생의 기숙사였던 서재와 동재가 남아 있다. 
선비체험에 참여한 어린이 여행객. 

선비체험에 참여한 어린이 여행객.

지금껏 방문했던 궁궐이나 유적지 등 여타 전통건축물과 서악서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쓰인 푯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출입을 막는 저지선이 어느 곳에도 하나 없었다. 대신 영귀루에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세요’라고 쓰인 친절한 안내판이 붙었다. 서악서원을 방문하는 누구나 전통건축물에 다가서고, 만져보고, 앉아보고, 둘러볼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서악서원도 다른 전통 건축물처럼 일반인에겐 마당만 허용했다. 2014년 문화재청이 전국에 남아 있는 향교(조선시대 국립 교육기관)와 서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면서야 비로소 사단법인 신라문화원이 서악서원을 전통문화 체험 장소로 가꿨다. 여행객은 체험이 있는 날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서악서원에서 유생 복장을 입어보고 다도를 배울 수 있다. 따로 신청하면 동재와 서재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2014년 이전 서악서원에는 쥐가 들끓었어요. 사람들 발길이 뜸하고 누구도 돌보지 않아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깨끗하게 정비를 해 놓고, 체험거리를 마련하니 한해 여행객이 1만5000명이나 찾아옵니다.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사람 손이 닿아 수명이 연장되는 문화재도 있어요.”
서악서원이 있는 경주 서악동은 신라 고분 50기가 밀집된 고분군이다. 신라문화원 선비체험에 참여하면 백등을 들고 야간에 무열왕릉을 답사할 수 있다.

서악서원이 있는 경주 서악동은 신라 고분 50기가 밀집된 고분군이다. 신라문화원 선비체험에 참여하면 백등을 들고 야간에 무열왕릉을 답사할 수 있다.

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은 “2014년 전국의 향교와 서원 38곳이 개방됐는데, 서악서원 등의 성공에 힘입어 현재 문화 공간으로 이용되는 향교·서원이 87개로 늘었다”고 덧붙였다. 
일일 선비가 되어 서원에서 보낸 6시간은 특별히 하는 일 없어도 즐거웠다. 한옥 건물의 시원한 맞바람을 맞으며 명상을 즐기고, 전통 활쏘기 죽궁도 체험했다. 서악서원이 있는 서악동에는 신라 고분 50기가 남아있다. 유생 복장을 하고 신라 24대 진흥왕 무덤과 주인을 알 수 없는 신라의 대형 고분 사이를 유유자적 산책했다. 동재 툇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땀을 식히니 금방 어스름이 내렸다. 
서악서원은 매주 토요일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서악서원은 매주 토요일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서악서원에서 진행되는 공연 모습.

서악서원에서 진행되는 공연 모습.

어둑해지자 서원은 낮과는 전혀 색다른 분위기로 변신했다. 색색의 조명이 켜지고 음향시설이 설치됐다. 서원 안마당이 야외공연장이 된 것이다. 2017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서원에서 국악뮤지컬 등 공연이 1시간 진행되오고 있단다. 이날은 국악음악단 가람예술단이 연주를 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무료공연이라 300석 객석이 꽉 찼다. 서원에서 보낸 하루 동안 즐거운 한량이 된 듯했다. 
문화재라고 하면 닫힌 공간, 죽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악서원은 사람의 생기가 가득했다. 박제된 '보존'이 아니라 ‘활용’이 문화재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개인 카페였던 서울 덕수궁 정관헌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다면, 신라 왕의 연회 장소인 경주 포석정에서 근사한 파티가 열린다면 멋지지 않을까. 현대인과 호흡하는 문화재에서 ‘발칙한’ 상상을 했다.  
 
◇여행정보=신라문화원(silla.or.kr)이 경북 경주 서악서원에서 문화재청·경상북도청·경주시청 후원으로 11월까지 달마다 1~2회 선비체험을 진행한다. 선비의 교류 공간이었던 서원에서 예절과 다도, 죽궁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진흥왕릉·서악리삼층석탑 등 신라시대 고분과 유적지 답사도 곁들인다. 일몰 후 무열왕릉 야간투어도 할 수 있다. 7월에는 8일과 29일, 8월에는 12일에 진행한다. 문화원 홈페이지에 11월까지의 일정이 나와 있다. 참가비 1인 1만원. 서악서원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7시 전통공연이 열린다. 선비체험 참가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무료 공연이다. 054-774-1950. 
동재와 서재 숙박은 일~목요일 객실 당 5만원, 금·토요일 7만원이다. 경주고택(sillaculture.cafe24.com)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다.  
경주에 남아있는 또 다른 서원인 옥산서원은 서악서원에서 차로 30분 거리인데 매주 토요일에 가면 무료로 차를 마실 수 있다.
 
경주=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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