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삶의 향기] 생애 처음 만나는 자유

정여울작가

정여울작가

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블랙리스트 작가였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 작가로 ‘찍혔다’는 것을 몰랐다. 분노보다는 부끄러움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지난 정부의 블랙리스트 작가로 관리될 만큼, 나 자신이 부당한 권력을 향하여 열심히 투쟁하지 못했기에 너무도 부끄러웠다. 내 무기는 오직 글쓰기뿐인데, 그 유일한 무기인 글쓰기에서마저도 나는 용감하지 못했다. 15년 넘게 작가로 살아왔지만, 지난 정권만큼 내 글쓰기가 자주 검열당한 적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원고 전체를 검열·수정당하거나, 힘들게 쓴 원고 자체를 ‘싣지 못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때마다 ‘부당한 세상’보다는 ‘좀 더 용기 있게, 과감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이 메마른 세상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글을, 정말 간절히 쓰고 싶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때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아서 날 당황시키는, 내 소중한 친구 J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너 자신을 숨기고 있어. 네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 뭔지, 난 알 것 같아. 네가 글을 쓰면서 결코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유를, 난 알아.” 친구는 아는데, 정작 나는 몰랐다. 내 글은 어딘가 애처로운 극한을 향했지만, 끝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갈 데까지 가고픈데, 갈 데까지 가버린 뒤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무언가를 미친 듯이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 두려움의 뿌리를 몰랐다. 그러다가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의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을 읽으며 내 용기의 결핍이 어디서 오는가를 깨달았다.
 
용기는 초인적이고 영웅적인 힘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용기는 ‘내 인생을 다 던져보고도,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엄마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마음껏 미친 듯이 달리고 넘어질 수 있는 아기처럼.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걸고 무언가에 도전하고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체 게바라의 시 ‘행복한 혁명가’에서처럼, 모든 걸 멋지게 던지고 그 꿈이 이루어지면 미련 없이 다음 꿈의 파종지를 향해 떠나고 싶었는데. “쿠바를 떠날 때/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당신은 씨를 뿌리고도/열매를 따먹을 줄 모르는/바보 같은 혁명가라고/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그 열매는 이미 내 것이 아닐뿐더러/난 아직 씨를 뿌려야 할 곳이 많다고/그래서 나는 행복한 혁명가라고.”
 
글쓰기는 흙수저로 태어난 내가 이 무정한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날개였기에, 제한된 공간에서나마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 마지막 보루가 ‘글을 쓸 수 있는 자유’임을 깨닫고 나니,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 꽁꽁 숨었던 용기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움츠린 가슴을 활짝 펴고 글을 쓰겠구나. 혹독하게 잃어버려 보았기에, 내가 본래 가졌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검열이다. 누군가 나를 검열하기도 전에 내가 나를 이미 검열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건 안 돼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공들여 쓴 내 문장을 스스로 삭제했다. 이제는 내 안의 웅크린 또 다른 나, 주눅 들고 상처 입어 원래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는 나를 깨워 힘껏 안아주고, 햇살 가득한 세상 속으로 끌고 나와야겠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그 어떤 예술도, 블랙리스트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세상의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아우르는, 한없이 넓고도 깊은 글을 쓰고 싶다. 사랑의 끝까지, 미움의 끝까지, 아픔의 끝까지 걸어가보고 싶다. 갈 데까지 가보아도,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싶다.
 
정여울 작가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