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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지하에 꽁꽁 숨었던 5만원권, 최근 지상으로 귀환하는 까닭

5만원권의 경제학
5만원권이 돌아오고 있다. 지하에 숨어 있던 돈이 서서히 지상으로 나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다.
 
한국에서 최고액권 화폐는 5만원권이다. 2009년 처음 발행됐다. 지속적인 물가 상승으로 1만원권 화폐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진 탓에 고액권 화폐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처음에는 10만원권 발행도 논의됐으나 5만원권으로 확정했다. 미국은 100달러 이상, 일본은 1만 엔 이상, 유로존은 100유로 이상 지폐도 발행한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0만원 이상 고액권이다.
 
2009년 10조7068억원 정도의 5만원권이 발행됐고, 점차 발행 규모가 늘어 지난해엔 총 22조8349억원의 5만원권이 시중에 풀렸다.
 
하지만 발행액을 지속적으로 늘려도 한국은행에 돌아오는 5만원권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5만원권 화폐에 ‘지하경제의 주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은 이유다. 특히 2014년에는 총 15조2625억원 규모의 5만원권을 발행했지만 한국은행으로 돌아온 건 3조9403억원에 불과했다. 환수율로 따지면 25.8%로 2010년 이후 가장 낮았다. 화폐 환수율은 일정 기간 중앙은행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량과 시중은행을 거쳐 다시 중앙은행으로 돌아온 화폐량을 비교한 비율을 말한다. 1만원권과 5000원권, 1000원권 지폐의 환수율은 100%에 가깝다.
 
5만원권이 ‘검은돈’으로 활용된다는 의혹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 먼저 최순실 재판의 한 장면.
 
“5만원권 지폐를 물 쓰듯 썼고 집에서도 비밀이 많았습니다. 안방과 딸의 방에는 각각 개인금고가 있었고요.”
 
‘국정 농단 의혹’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61)씨의 가사도우미는 법정에서 최씨의 평소 소비 행태에 대해 이같이 증언했다.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때도 카드가 아닌 현금을 고집하는 등 비밀이 많았고, 특히 5만원권을 뭉치로 들고 다녔다는 내용이다. 현금에 대한 최씨의 애착은 스포츠컨설팅회사인 더블루K의 최초 자본금과 사무실 임대보증금 등 1억여원을 현금으로 처리했다는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전액 5만원권이었다.
 
2011년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110억여원이 넘는 현금 뭉치가 발견됐다. ‘마늘 밭 돈다발’ 사건이다. 당시 발견된 현금은 전부 5만원권으로, 총 22만 장에 달하는 양이었다. 경찰 수사 결과 이 돈은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개장해 번 돈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지하의 어두운 곳을 찾아 꽁꽁 숨었던 5만원권이 올 들어 지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에 대거 환수되고 있어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 환수된 5만원권은 총 4조5943억원으로 환수율이 66.0%에 달했다. 지난해 4분기 57.5%보다 8.5%포인트 상승한 수치로, 특히 2012년 4분기(86.7%) 이후 4년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5만원권 환수율이 증가한 이유로는 ▶구권 유입량 증가 ▶한국은행의 의도적 환수▶김영란법 시행 등이 꼽힌다. 우선 과거 발행한 5만원권이 유통과정에서 훼손되고 낡아 자연스럽게 신권 교환 수요가 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은행은 5만원권 지폐의 내구성을 고려해 적정 유통기간을 약 100개월로 설정했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 이후 8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올해가 본격적으로 5만원 구권이 되돌아오는 시점이라는 의미다.
 
한은이 각 금융기관에 지급하는 신권 화폐의 운영 기준을 바꾸는 등 의도적으로 환수율을 높여온 것도 ‘5만원권의 귀환’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한은은 2015년부터 5만원권 환수율이 높은 은행을 대상으로 명절 등 대규모 자금방출기간에 1만원권 신권을 더 배분하고 있다. ‘신권’에 대한 수요가 높은 금융사들이 5만원권 환수에 공을 들이며 과거보다 환수율이 더 높아진 것이다.
 
지난해 9월부터 본격 시행된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지하에 숨어 있던 5만원권을 양지로 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은은 지난해 국정감사 답변자료를 통해 “김영란법 제정 시 5만원권 지하경제 유입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뇌물과 청탁이 감소하고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5만원권이 시중에 유통되는 비율이 높아지고 환수율 또한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S BOX] 미국·유럽처럼 2만원권 도입 주장도
5만원이 비자금 조성과 탈세 등 범죄에 활용된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일부에선 ‘5만원권 폐지론’이 제기된다. 특히 5000원 이하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게 보편화된 ‘현금 없는 사회’에 가까워지면서 5만원권의 필요성이 낮아졌다는 목소리가 있다. 반면 물가 상승으로 돈의 단위가 커진 만큼 5만원권을 폐지하면 불편해진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일각에선 5만원권의 대안으로 2만원·3만원권을 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화폐 체계를 ‘1·2·5’로 세분화하자는 주장이다.
 
세계 주요국에선 대부분 2단위의 지폐를 발행하고 있다. 미국의 20달러(약 2만2400원)와 일본의 2000엔(약 2만원), 중국의 20위안(약 3300원)이 대표적이다. 2014년 한국은행이 2만원권 도입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당시 이주열 한은 총재가 나서 “10만원권은 몰라도 2만원권 발행은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고 밝혀 해프닝으로 끝났던 적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은행 관계자는 “2만원권이나 3만원권이 있으면 분명 화폐 사용의 편의가 증대되겠지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시스템을 비롯해 금융산업 전반의 프로그램을 뜯어고치는 데 드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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