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90대인 A씨가 사망하자 그다음 날 아들 B씨가 KEB하나은행을 찾아왔다. B씨에겐 형제 세 명이 있지만 다른 상속자의 인감증명서와 인출 동의서를 챙겨올 필요는 없었다. A씨가 사망 2주 전 이 은행에서 가입한 상품은 예금이 아닌 ‘가족배려신탁’이었기 때문이다. 유산 분할을 위한 절차 없이 미리 지정해둔 사후 수익자가 맡긴 돈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이 은행 신탁부 배정식 팀장은 “자녀에게 장례 치를 비용은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신탁상품”이라며 “최소 가입금액 500만원(예치형)으로 문턱을 낮췄더니 고령층 문의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일반에 생소했던 신탁 서비스가 성큼 생활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탁 시장 규모(부동산 전업사 제외)는 지난해 말 기준 560조원. 지난해보다 98조원, 최근 2년간 140조원 급증했다. 은행권 신탁 자산만 따져도 전년보다 23%나 성장한 356조원을 기록했다. 각 은행이 저금리·고령화 시대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른 신탁 시장을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신탁이란 말 그대로 고객이 금융회사를 믿고 돈이나 재산(부동산·주식 등)을 맡기는 서비스다. 금융회사는 고객의 운용지시를 받아 ‘종합선물세트’처럼 예금·주식·채권·펀드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이용해 돈을 굴릴 수 있다. 재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보관·관리·처분하는 종합적인 자산관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신탁은 은행과 고객 간 일대 일 계약이기 때문에 온라인 판매를 할 수 없고 광고·홍보 역시 제한된다. 이 때문에 그동안은 일반 고객들은 이용하기 어려운 고액 자산가를 위한 서비스로 인식됐다.

최근 들어 신탁이 재조명 받은 건 저금리 영향이 크다. 정기예금 금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을 겨냥해 각 은행이 중위험·중수익의 신탁상품을 잇따라 선보였다. 우리은행이 지난 3월 내놓은 달러 주가연계신탁(ELT)은 수탁액이 지난달 말 1억 달러를 넘어섰다. 달러 ELT는 달러로 표시된 ELS(기초자산 S&P500과 유로스탁스 지수)에 투자하는 상품으로, 수익률(연 3.5~3.6%)이 원화 ELT(3~3.37%)보다 높다. 달러가 강세를 띠면 환차익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손실 구간을 두지 않아 좀더 안전한 상품만 판매한다”며 “수익성과 손실위험 사이에서 고민하던 고객들이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지난 3월 은행이 받는 보수를 고객 수익률과 연계한 업그레이드된 신탁 상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인기를 끌었다. 국민은행 ‘착한신탁’은 만기 3년짜리 ETF(상장지수펀드)·ETN(상장지수증권)에 투자하면서 초기 6개월 동안 목표수익률(3% 또는 5%)을 달성하지 못하면 연 0.5%인 보수를 이후 0.1%로 낮춰주는 조건을 내걸었다. 신한은행 ‘동고동락신탁’은 만기(2년)까지 목표수익률(4% 또는 6%)에 도달하지 못하면 성과보수(0.3%)를 아예 받지 않는 상품이다. 만기 전이라도 목표수익률에 달성하면 다음날 즉시 상환해준다. 동고동락신탁은 출시 2주 만에 500억원 어치가 판매됐다.

최근엔 세월호로 부모와 오빠를 잃은 권모(8) 양의 임시 후견인인 고모가 권양에게 나온 보상금·보험금 등 15억원을 KEB하나은행에 맡기는 신탁계약을 맺었다. 권 양은 매달 250만원씩 은행에서 생활비를 받다가 만 25세가 되면 남은 재산의 절반을, 만 30세엔 나머지 재산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은행권 신탁 열풍엔 이면도 있다. 관리하는 신탁자산은 급증했지만 따져보면 실속이 없는 ‘외화내빈’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단기특정금전신탁(MMT)과 정기예금, 금전채권신탁(기업의 매출채권 유동화 관련 신탁) 같은 금융회사가 받는 수수료가 거의 없는 ‘무늬만 신탁’이 수탁액(560조원)의 절반 이상(282조원)을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선 다양한 신탁상품이 나오기 어려운 제도적 한계도 지적한다. 미국과 달리 상속·증여와 관련된 신탁에 대한 세제혜택이 없는데다, 비대면 가입이나 홍보·광고 규제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가 ‘신탁업법’을 새로 제정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러한 제도 개선을 위해서다. 이경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아직은 개인들이 ‘신탁으로 내 재산을 관리하겠다’는 인식이 자리잡지 않은 상황”이라며 “규제 완화와 세제혜택 부여, 고령화가 맞물린다면 한국에서도 신탁이 점차 활성화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