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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장밋빛 공약과 세 가지 관문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대통령은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한 번 지시하면 그 지시는 곧바로 잊혀진다. 두 번째 언급하면 조사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세 번째로 다시 강조하면 그제야 비로소 그들은 이것이 중요한 사안인가 보다고 짐작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자리라는 미국 대통령이 방대한 행정부를 이끌면서 부딪치는 딜레마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처럼 압축해 말한 바 있다. 5월의 대통령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필자가 미국 대통령들의 ‘트루먼 딜레마’를 새삼 떠올리는 까닭은 새 대통령의 성공이 달콤한 공약보다는 공약을 집행하는 공직사회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책 반대자들을 설득하는 힘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엊그제 후보 TV토론에서도 치열하게 논쟁했듯이 북핵 위기, 일자리 창출, 저출산대책, 신성장동력 발굴 등 절박하고 심각한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 새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TV토론을 지켜봤던 많은 시민은 후보들의 정책적 식견, 정책상의 비판에 대처하는 태도를 눈여겨보면서 투표 선택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을 것이다. 81만 개의 공공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과연 그에 필요한 수조원대의 예산을 마련할 수 있을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3%까지 올리겠다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과연 임기 내에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 관심 있게 지켜봤을 것이다.
 
문제는 일자리 만들기 정책이든 저출산대책이든 모든 정책 공약은 3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실질적으로 보통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첫째, 공약을 법제화하는 다당제 국회의 입법 관문이다. 둘째는 공약을 실행하는 관료제의 집행 관문이며, 셋째는 정책 재원의 비용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담세자의 저항 관문이다.
 
다당제 국회의 법제화 관문은 그간 협치·공동정부 등등의 이름으로 종종 논의돼 왔다. 반면 관료제의 집행 관문이나 담세자의 저항 관문은 그동안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엊그제 TV토론에서야 비로소 대기업, 고소득층 세 부담 증가에 대한 언급이 잠시나마 이뤄졌을 뿐이다.
 
지난주 후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0대 공약과 그에 대한 재원 마련 방안을 살펴보면 관료제와 담세자의 관문은 좀 더 실감나게 와 닿는다. 연간 수조원의 추가 예산이 각각 필요한 기초연금 월 30만원 지급이나 청년구직수당, 월 50만원씩 지급하는 출산수당 등의 재원 마련에 대한 후보들의 해법은 마치 서로 짜맞추기나 한 듯 ‘재정지출 개혁’과 ‘세입 증대’에 맞춰져 있다(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후보별 20쪽짜리 10대 공약의 목표, 실행계획 등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이 지루한 말싸움과 동문서답으로 얼룩진 TV토론 시청보다는 정신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
 
후보들이 말하는 재정지출 개혁이란 결국 (1)부처 간 중복사업의 조정·정리를 통한 예산 절감 (2)기존 예산항목의 폐지 혹은 축소 조정을 통한 예산 절감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말해 새 대통령이 공약 재원의 확보를 위해 부처 간 이기주의와 부처의 제살 깎아내기라는 지난한 과제에 도전해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임기 초반엔 정부구조 개편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관료사회를 호령하고 이들이 대통령 공약사항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예산’을 급하게 쥐어 짜내어 집행하도록 압박해 왔다. 하지만 황금빛 봉황 무늬로 치장한 대통령 공약사업들은 임기 초반에만 반짝 추진될 뿐 대개는 행정부처들의 이기주의, 부처 갈등과 대립 혹은 관료사회의 비협조 속에서 길을 잃곤 했다.
 
임기 5년의 (더구나 국회 소수파) 대통령이 평생 임기가 보장된 관료사회를 단번에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새 대통령이 강조하는 청년구직 지원, 노령층 삶의 보장 등이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절실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의 성실한 집행이 관료조직 스스로의 성취감·존재감·자존감을 높인다는 평범한 사실을 설득해야만 한다. 서류상의 지시와 (한국식) 윽박지르기는 트루먼이 일찍이 간파한 바와 같이 관료사회의 복잡다단한 절차와 규정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 버릴 뿐이다.
 
남은 20여 일 동안 필자는 후보들의 정책지식 못지않게 완고한 상대를 설득하는 후보들의 힘을 눈여겨볼 생각이다. 관료들이 노인 빈곤,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부처 간 장벽을 넘어 중복사업들을 합리적으로 정리하도록, 달리 말해 관료조직의 좁은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그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만한 설득의 힘을 갖춘 후보가 누구인지? 대기업·중견기업과 여유 있는 계층에 늘어나는 조세 부담이 당장은 고통스럽고 언짢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공동체의 평화를 구축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점을 설득할 만한 진지함과 신뢰를 갖춘 후보가 누구인지를 따져 볼 생각이다.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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