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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허락해야 딛을 수 있는 곳

기자
전새벽 사진 전새벽
거문도에 다녀왔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이나 더 가야 하는 이 섬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다. “아 거문도! 나도 가봤어. 거기 조선소 많은 곳이잖아,”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거긴 거제도야”라고 퉁을 주자 그이는 내게 그럼 거문도는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명석하게 답하지 못하고 쭈뼛거리자 “지도 모르면서”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사실 거문도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말로 쉽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서 입을 다문 것뿐이다. 즉 역사나 인구통계, 특산물 따위가 아니라, 그곳의 언어와 정서에 대해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곳에 살아보지도 않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아느냐면, 그곳에서 얻은 언어와 정서로 글을 쓰는 한 소설가 덕분이다.
 
어느 날 친구가 “이거 읽어봤어?”라고 책을 건넸다. 책은 남쪽 바다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다 읽고 나자 고즈넉한 섬마을의 바닷바람을 쐬고 온 느낌이 들었다. 곧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고 싶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읽다 보니 그는 책마다 ‘여전히 거문도에서’라고 인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 거문도에 갔다. 그 소설가의 책 한 권을 들고 무작정 갔다. 운이 좋으면 그를 마주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볕이 따가운 어느 가을이었다.
 
말하자면 긴 얘긴데, 나는 무작정 찾아간 그 섬에서 정말 그 소설가를 만났다. 유림해변을 지나 삼호교를 향해 걷는 중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파도는 높고 하늘은 투명했다. 멀리서 탈탈탈 오토바이가 다가오는데 어딘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분’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분이 탄 오토바이가 가까워오자 별안간 구름 사이로 햇빛 한줄기가 땅으로 떨어지고 멀리서 지저귀던 새들이 울음을 그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던 파도는 잠잠해졌다는 일은 물론 없었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동네 아저씨와 여행객처럼 마주쳤다. 나는 서울에서 온 독자라고 스스로를 밝혔고 그는 기꺼이 사진 촬영에 응해주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살면서 가장 두근댔던 일을 두 개만 꼽으라면 그 중에 하나가 그때였다.
 
그것을 계기로 다른 인연도 만났다. 블로그에 써둔 거문도 여행기에 누가 댓글을 달았다. 그녀는 본인이 거문도 출신이며, 고향에 대한 짙은 그리움으로 습관적으로 거문도 여행기들을 검색해 읽어왔다고 했다. 게다가 그 소설가의 동창생이자, 출판사에 근무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나는 그 소설가에 대해서도, 책을 내는 일에 대해서도 듣고 싶은 게 많았다. 괜히 아들 뻘 청년의 시간만 뺏을 거라는 그분에게 고집을 부려 만남을 가졌다. 글을 잘 쓰던데요, 라며 그분은 졸렬한 내 글을 칭찬했다. 출판사 편집장으로부터 글 칭찬을 받다니! 살면서 가장 두근댔던 다른 한 순간이었다.
 
그들과 함께 거문도에 다녀왔다. 위의 두 사람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를 두근대게 했던 후배까지, 넷이 여수에서 거문도 가는 배에 올랐다. 나이와 직업이 제 각각인 기묘한 조합이었지만 마음만큼은 같았다. 거문도에 가게 되어 좋다는 것이었다. 이십 년 만에 고향에 가게 되어 소녀시절로 돌아간 네 아이의 엄마, 풍랑 때문에 육지에서 발이 묶였다가 며칠 만에 집으로 가게 되어 기쁜 소설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낯선 섬에 가게 되어 들뜬 대학생, 이 모든 게 그저 꿈 같이 느껴지는 아둔한 회사원까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오후에는 배낚시를 나갔다. 소설가는 사실은 어부고 남는 시간에 소설을 쓰는 건지, 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배를 공동으로 소유한 뱃사람이자 슈퍼주인이자 사진작가까지 합세해 기묘한 오인조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이번에는 각기 다른 마음이었다. 육지에서 온 손님들과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는 게 그저 즐거운 슈퍼주인, 비싼 낚시대가 낚시 초보들에 의해 부러질까 노심초사하는 소설가, 낚시 같은 것보다는 바다 건너 고향집이나 바라보고 싶은 네 아이의 엄마, 동경해마지 않던 소설가가 손수 채비를 만들어 달아주니 감개무량한 대학생, 이 모든 게 아직도 꿈 같이 느껴지는 아둔한 회사원까지, 각기 다른 마음이었다. 그러나 대충 낚시를 끝내고 소주병을 비틀자 금세 한마음이 되었다. 봄바람은 포근하고 바다는 상냥했다. 비록 낚시 성과가 저조해 회 맛은 못 봤지만 김밥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났다. 산도 들도 아니고 바다 위에서의 소풍인데, 신문지를 씹었더라도 꿀맛이 났을 테지만.
 
낚시를 끝내고는 횟집에 모였다. 음식에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거문도의 음식 맛은 여전히 끝내줬다. 맛있는 음식이 술을 부르고, 술이 노래를 불렀다. 마침 오늘이 한 달에 한번 있는 밴드 공연이 있는 날이라고도 했다. 밴드가 공연을 시작했는지 멀리서 드럼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모두들 취기를 느끼며 밖으로 나가 길거리 공연을 즐겼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단체 관광객들이 이미 춤판을 벌인 참이었다. 달빛은 넉넉하고 밴드는 노래를 잘했고 사람들은 흥에 겨웠다. 멀리서 나를 잊지 말라는 듯 철썩-하고 파도가 기별을 보내기도 했다. 새빨간 동백꽃이 길마다 떨어져 있고 낚싯줄을 드리우면 커다란 전갱이가 무는 봄의 거문도였다.
 
서울로 돌아온 아둔한 회사원은 정장을 입고 모니터 앞에 앉아 타자를 치면서, 아직도 그때를 꿈처럼 느낀다. 거기에 다녀온 증거라고는 휴대폰에 남은 사진 몇 장이 다인데, 그마저도 환상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곳과 이곳의 풍경은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지면은 물론 캔버스도 소용없고 가상현실에 증강현실을 동원해도 표현해 낼 길이 없다. 궁금하면 가보라. 여수연안여객터미널에서 하루에 두 번씩 배가 뜬다. 다만 날씨가 조금만 궂어도 배는 뜨지 않으니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남았으랴. 하늘이 허락해야 딛을 수 있는 곳, 거문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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