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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준 선물, ‘시진핑의 골칫거리’가 될 줄이야...

북한의 공세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한-미 군사훈련에 대해 선제 타격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젠 중국도 무서울 게 없다는 태도다.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다. 스스로 핵 보유 국가로 인식하고 있는 북한은 중국에게도 불편한 존재다.
 
한반도 정세는 지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도대체 이 구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과거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가...?
 
6.25전쟁 이후 북한은 남침을 계획한 적이 있었다. 1975년이 바로 그 해다. 강대국의 국제정세와 인도차이나 반도 상황의 급반전이 잠자고 있던 김일성의 마음에 불을 당겼다. 그는 중국을 믿었다. "다시 한 번 밀어달라, 이번에는 반드시 남한 정부를 밀어내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의 위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 과정을 살펴 오늘을 이해해보자.

1950년 남침하는 북한군 [사진 중앙포토]

1950년 남침하는 북한군 [사진 중앙포토]

 
당시 강대국의 국제정세는 ‘닉슨 쇼크’로 데탕트 무드가 잠시 확산되다가 다시 냉전적 분위기로 복원될 때였다. 미국과 중국은 국내정치적 문제로 ‘닉슨 쇼크’를 이어가지 못했다.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소련 관계도 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정(SALTⅡ) 협상이 꼬였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4인방을 중심으로 한 좌파 지도자들이 비록 마오쩌둥의 작품이었지만 미국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이런 강대국의 냉전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보태진 것이 캄보디아의 공산화였다. 중국이 지원하던 반군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1925~1998)가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다. 김일성은 ‘이때다’ 싶었다. 바로 다음날 공개리에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김일성은 중국이 폴 포트에게 하듯이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오산이었다. 이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던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25년 전으로 돌아가기는  너무 늙어 버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다. 한·미 동맹 체제가 여전히 공고히 존속했고 중·소는 앙숙이 돼 버린 상황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중국이 폴 포트를 대폭 지원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은 1973~1975년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을 치르는 등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베트남과 반목하고 있던 폴 포트를 돕고 싶었던 것이다. 아울러 소련과 ‘눈이 맞은’ 베트남이 미웠다.  

캄보디아 전쟁 당시 낚시바늘 지역에 공수된 美 25보병사단 소속병사가 M16소총을든채 공산군의 저격을 피해 논두렁에 몸을 감추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캄보디아 전쟁 당시 낚시바늘 지역에 공수된 美 25보병사단 소속병사가 M16소총을든채 공산군의 저격을 피해 논두렁에 몸을 감추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중국은 ‘김의 전쟁’을 도울 이유도 없었고 돕고 싶지도 않았다. 또 다시 미국과 맞짱을 뜬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와 저우는 김일성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 문제를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맡겼다. 덩샤오핑은 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당군사위 부주석을 맡고 있었다. 마오와 저우가 김일성을 만날 때 덩샤오핑이 배석했다.  
 
덩샤오핑은 김일성과 이틀 간 회담을 했다. 두 사람은 1950년대부터 인연이 있었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뻔질나게 드나들때 접촉은 있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김일성: 인도차이나 반도를 봐라. 베트남, 캄보디아가 혁명에 성공했다. 지금이 호기다.
덩샤오핑: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경제재건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므로 김 주석이 계획하는 ‘혁명적 전쟁’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다. 베트남의 경우는 해방전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한반도는 이미 정전이 된 지 20여 년이 경과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1975년 4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왼쪽)이 문병차 저우언라이(가운데)를 찾아 담소하고 있다. 오른쪽은 덩샤오핑. [사진 김명호]

1975년 4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왼쪽)이 문병차 저우언라이(가운데)를 찾아 담소하고 있다. 오른쪽은 덩샤오핑.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오·저우도 마찬가지였다. 대신에 중국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 1월에는 ‘조·중 석유공급 협정’을 체결해 양국 합작으로 다칭(大慶)에서 신의주를 거쳐 평안북도 피현군 봉화화학공장에 이르는 총 1000km의 송유관 건설을 시작했다.  
 
마오는 평소에 “석유와 원자탄이 제일 중요하다. 그것 두 개만 있으면 어디 가도 큰소리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잘난 척해도 국제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1973년까지 대북 석유공급을 거의 독점했던 소련은 ‘오일쇼크’ 이유 석유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그래서 중국의 송유관 건설은 북한에게 큰 선물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방중으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방중 직후 그것을 후계자 김정일의 입을 빌어 말했다. 김정일은 노동당 비서·부장·부부장 협의회에서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적과 싸워 이길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조국해방전쟁(6.25전쟁) 때 우리가 후퇴한 것은 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김정은이 지난해 핵무기 연구 부문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만나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북한 김정은이 지난해 핵무기 연구 부문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만나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아울러 김정일은 “더욱이 미제침략자들은 우리와 대결에서 물질 기술적 우세를 믿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 준비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북한은 1975년 이후 중국에 대한 동맹 의존성을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안이 필요했다. 김일성·김정일이 생각한 물질 기술적 우세가 바로 원자탄(핵무기)이었던 것이다.  
 
김씨 부자는 마오의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석유와 원자탄. 석유는 중국이 주니 원자탄을 가지면 마오의 말대로 어디 가도 큰소리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씨 부자가 오매불망 바라던 원자탄을 김정은이 보유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오가 북한에 준 ‘선물’이 지금 시진핑에게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글=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정리=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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