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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재벌, ‘가 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할 때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봄볕이 따사했던 지난 14일, KT가 개발한 자율주행 버스가 평창 인근 도로를 달렸다. 자율주행 드론이 그 버스를 추적해 탑승객에게 물품을 배달하는 데 성공했다. 황창규 회장이 주도하는 ‘기가혁명’의 작은 기적이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선은 삼성동에 쏠렸다. KT의 화려한 부활, 아니 4차 산업혁명의 대동맥인 ‘5G 지능네트워크’의 기대 지평을 확장하는 KT에 오히려 세계 통신업계가 긴장했다. 한 달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운집한 세계 통신전문가들은 ‘5G 너머 새로운 세상’을 시연하는 황 회장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인공지능을 결합한 그 놀라운 세계, 대선주자들이 표 모으기에 끌어대는 가상적 신세계를 정작 현실화하는 황 회장의 귀국길은 쓸쓸했다. 헌재 판결문에 공기업 KT가 최순실 광고수입을 도왔다고 적시됐다.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기업 포스코 역시 마찬가지다. 이정미 권한대행이 대통령 파면을 선언한 두 시간 뒤 포스코 주주총회가 열렸다. 권오준 회장 연임을 인준하는 자리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출연건이 불거졌다. 대통령의 청탁을 거부할 간 큰 대기업이 어디 있으랴. 권 회장의 재임 동안 포스코는 126건의 구조조정을 감행해 채무를 6조원 줄였고, 영업이익이 19%포인트 올랐다. 연구자 출신인 권 회장이 신소재에 눈을 돌린 것이 주효했다. 철강 외에 리튬, 니켈, 마그네슘, 티타늄 등 4차 산업혁명 핵심 소재의 글로벌 공급자로 등극하려는 일대 변혁을 진두지휘했다. 검은 연기 뿜어내는 근육질의 철강공장을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을 도입한 ‘스마트 팩토리’로 변신시킨다면 곧이 믿을까만 권 회장의 각오는 비장했다. 스마트 팩토리의 선두주자인 미국 GE, 독일 지멘스와 연대협약을 맺었다. 그러곤 포스코가 건설한 3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 가동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날아갔다. 그의 귀국길도 쓸쓸할 것이다.
 
탄핵 후폭풍에 편승해 대선주자들이 재벌 때리기에 나섰다. 재벌 때리기는 ‘지지율 상승’이란 한국 정치의 불쾌한 등식이 뇌물죄라는 또 다른 동력을 얻었다. 대표기업 삼성은 옴짝달싹을 못하고, SK·CJ·롯데가 전전긍긍이다. 롯데는 대체 무슨 팔자인가. 검찰, 국세청의 합동 수사에 시달리더니 이번에는 30여 개의 중국 매장이 폐쇄됐다. 오금이 저린 총수가 한둘이 아니다. 출감한 지 얼마 안 되는 SK 회장은 또 큰칼을 목에 걸어야 하나? CJ는, LG는? 재벌을 멋지게 때려 대권에 등극하면 약속을 지키려 계속 때려야 한다. 5월 대선 이후 족히 1년은 재벌 공안정국이 계속될 거다. 재벌 저격수 김상조 교수가 문재인 캠프에 가세했으니 갑호 경계령이 발령됐다. 
미국 앨라배마 현대차의 한국인 CEO는 지역 명사다. 주정부 연회나 공연에 초대되어 박수갈채를 받는다. 끝없는 목화밭에 연봉 7만 달러에 달하는 최고의 일자리를 4만 개나 창출했다. 주요 인사들은 한글 명함판을 따로 갖고 다닌다. ‘로버트 벤트리 주지사, 앨라바마주’ ‘존 베레스 3세, 어번 대학 총장’ 이런 식이다. ‘풀타임 3만8000명, 협력업체 1만2000명, 세수 8000만 달러, 남부의 디트로이트로 부상함.’ 어번대 데라비 경제학 교수가 그렇게 요약했다. 애틀랜타 공항라운지에 현수막이 걸렸다. “옵티마가 이제 우리 조지아에서 생산됩니다!” 옵티마는 기아차 K5의 미국명이다.
 
요즘 각광받는 GM 자동차 생산기지인 군산 시내 어디에도 이런 현수막을 걸 수 없다. 그랬다간 혼이 비정상이란 소릴 듣는다. 삼성 평택공장 신설은 아직도 난항 중이다. 대선주자 문재인이 군산조선소에 현대중공업 일감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군산의 몰락을 걱정한 말이었지만 ‘일감 나누기’는 원래 노조 소관이다. 기업은 일자리 창출, 정부는 일자리 지킴이 역할을 하는 게 노동시장의 분업 원리다. 노조천국 스웨덴에서는 대기업이 부정과 범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자리 창출을 강요하거나 부정한 돈을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재벌 때릴 일이 널려 있다. 정권과 흥정을 통해 일감 몰아주기, 가격 후려치기, 비정규직 양산, 협력업체 압박 등 독소들이 번성했다. 차제에 정경유착 둥지인 전경련을 해체하고, 집권세력도 손 벌리지 않겠다는 대헌장에 연대 서명해야 한다. 하도급의 본산인 일본의 자이바쓰(재벌)가 양극화 주범이란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재벌 때리기는 결국 자업자득이다. 반복되는 정치적 매도와 기업 냉소가 이토록 팽배한 나라에서 4차 산업혁명이 가능할까. 권력중독증을 털고 공익과 정의에 솔선하는 ‘기업시민’으로 변신하겠다는 혈서(血書)라도 써야 할 판이다. 국회청문회에서 그리 처절하게 당한 마당에 대국민 맹약(盟約)에 나서면 어떨까. 시장점유(market share)보다 마음공유(mind share), 시민윤리에 앞장서는 기업시민, 그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말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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