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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문학] 편집자 소설과 염소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볼테르의 유명한 소설 『캉디드』에는 “랄프 박사가 독일어로 쓴 글을 번역”이라는 말이 표지에 명시돼 있다. 물론 거짓말이다. 랄프 박사는 가공의 인물이며, 문제의 소설은 볼테르 자신이 처음부터 프랑스어로 쓴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소설로 우의할 때 자주 번역자나 편집자 행세를 하며 자신은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출간된 소설들을 편집자 소설이라고 부르며, 권력의 검열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동일한 저자가 논증을 필요로 하는 철학적이거나 정치적 논설에서는 더욱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으니 검열에만 그 원인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설은 논설과 달라 감수성의 문을 열고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밑바닥을 흔들어야 한다. 편집자 소설의 저자들은 지루한 세상에서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낯선 인물이나 외국 작가의 이름이 그 신비로운 분위기를 통해 생산해낼 수 있는 매혹에 기대를 걸었을지 모른다. 한 세기 후의 일이지만, 보들레르의 산문시에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는 알루아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가 그 예증이 될지 모른다. 이 책의 서문에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 디종의 한 공원에서 추레한 사내를 만나 ‘예술’에 관해 장시간 진지한 토론을 하던 끝에 사내의 ‘예술’이 완전히 들어 있다는 글의 원고를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고를 돌려주기로 약정한 날 그는 디종 시내를 헤맸으나 사내를 만나지 못하고, 그가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만 받는다. 그 원고가 바로 『밤의 가스파르』다. 알루아시우스 베르트랑은 산문시라고 하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지니게 될 기이한 매혹을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과 상실 문제를 돌아본 연작소설집을 낸 김선재.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사진 백다흠]

죽음과 상실 문제를 돌아본 연작소설집을 낸 김선재.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사진 백다흠]

김선재 연작소설집 『어디에도 어디서도』는 네 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지만, 그 앞에 ‘틈’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 하나를 더 싣고 있다. 일종의 서문이다. 어느 날 새벽에 염소임이 분명한데 문명인의 옷을 입은 한 존재가 찾아왔다. 그는 저자가 찍은 설경 사진 한 장을 문제 삼으며 눈 덮인 숲 언저리의 얼룩이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위험이 된다’는 뜻의 말을 하며 “눈은 더 눈답게, 숲은 더 숲답게” 만들기를 당부한다. 그러고는 ‘그간의 사례에 대한 연구보고서’라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놓고 저자에게 서명할 것을 강요한다. 저자가 서명을 끝냈으니 그의 소설집이 그 염소인간의 서류에 대한 우리말 버전일 것이 분명하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네 편의 소설은 저 눈밭의 얼룩들, 다시 말해서 상처 입은 기억의 시간에 대한 고찰이다.
 
아는 것이 많고 문장이 유창하다고 해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만이, 마음속의 처절한 상처를 염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는 인간만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그래서 시와 소설의 진실도 아름다움도 인간의 처절함과 염소의 무심함 사이에서 결정된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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