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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뛰다가 문득, -운동과 노동에 대하여-

기자
전새벽 사진 전새벽
달리기에 빠졌다.

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휴일이면 곧잘 찾는 집 앞의 공원을 걷는 중이었다. 갑자기 운동화 속의 발가락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면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달리고 싶다, 는 구체적이고 소박한 충동이었다. 볕 좋은 어느 여름 날이었다.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언제부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좋을까? 물론 ‘바로’다. 그래서 나는 뛰기 시작했다. 벚나무가 늘어선 산책로에서 달리기 시작해 나무로 된 다리를 지나 매점을 지나 갈대밭을 지나 커피숍을 돌아 제자리로 오기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숨은 가쁘고 입은 마르고 허벅지는 끊어질 것 같았는데 기분은 좋았다. 그래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공원에 갔다. 벚나무가 늘어선 산책로에서 시작해서 커피숍을 돌아 뛰어다녔다. 숨은 가쁘고 허벅지는 끊어질 것 같은데, 기분은 계속 좋았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참 많이 뛰어다녔다. 축구와 농구에 깨나 열을 올리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다만 공이 있을 때만 뛰었다. 그러니까 공도 없이 그저 달리는 이런 행위가 쾌감을 줄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 내게 갑작스레 뜀박질의 충동이 찾아온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기 좋아하는 내가 세운 가설은 이런 것이었다. 그 동안 수많은 러너들이 이 길을 뛰어다니며 흩뿌린 땀이, ‘상쾌하다,’ ‘즐겁다’ 는 러너들의 기분을 머금은 채 이 트랙 위로 스며들어 이 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기운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길이 사람들의 마음에다 ‘상쾌하고 즐겁게 달려보라’는 충동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얘기를 하면 아주 수상쩍은 사람 보듯이 나를 흘겨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 어쨌거나 중요한 건 분명한 충동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달리기는 금세 재미있어졌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게 된다는 것도, 기록이 점점 좋아지는 것도, 체중이 줄어드는 것도 모두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연말 정기검진 때는 ‘폐활량이 남다르시네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그렇게 달리기 예찬자가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고 공원이 온통 눈으로 뒤덮이자 나는 달리기를 잠시 멈춰야 했다. 아쉬움을 억누르며 긴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오랜만의 달리기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숨은 가쁘고, 아무튼 엄청나게 괴로웠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고통스러운 기분이었다. 나무로 된 다리를 지나 갈대밭에 이르렀을 때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몸이 그 지경에 이르자 마음속에서 오래 묵은 질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이것은 그렇게 시작된 운동과 노동에 대한 단상이다.

                                                                 ♦

쓸데없는 것 고민하는데 시간 쏟기를 좋아하는 나는 평소에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사람은 왜 걷고 숨쉬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건강해지도록 설계되지 않았을까?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운동을 따로 해야만 건강할 수 있는 걸까?

나는 그것이 아주 진지하게 의문스러웠다. 균형 잡힌 신체와 원활한 신진대사를 위해서는 몸을 꾸준하게 혹사시켜야 한다니, 세상에 그런 모순적인 자학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습관처럼 사전을 뒤지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에게 부여된 숙제는 운동이 아니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건강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던 것이다!

운동과 노동은 모두 같은 동動자를 쓴다. 다만 앞에 붙은 한자가 다르다. 운동의 ‘운’은 옮길 운運이라는 것인데 ‘옮기다’가 1번 뜻이다. 집에서 공원까지 나를 옮기는 움직임, 바닥에 놓인 아령을 어깨까지 옮기는 움직임이 곧 운동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한자의 뜻 중에 ‘어지럽다’라는 뜻이 있다. 이래서 뜀박질을 하면 어지러웠던 걸까.)

반면에 노동은 일할 노勞를 쓰는데 물론 ‘일하다’라는 뜻이다. (이 한자의 다른 뜻에는 ‘고달프다’라는 뜻이 있다. 어쩐지 눈물이 나는 대목이다.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래, 동물의 필수조건이 ‘무언가를 옮기는 것’ 일리 없다. 동물의 조건은 ‘일한다’ 였던 것이다. 

초식동물은 초원으로 나아가 풀을 뜯고 맹수는 먹이와 경주를 벌인다. 인간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들짐승을 사냥하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왔다.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모든 동물의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젠가부터 육체노동을 잃어버렸다. 너무 많은 직업이 앉아서 컴퓨터를 가지고 하는 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을 잃어버린 우리의 일상은 지나치게 단조롭다. 만일 외계인이 와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관찰해 기록한다면 그의 보고서는 이런 식일 것이다. ‘종일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며 버튼을 입력함. 그 외의 신체활동 미비함. 앉은 자세가 대부분. 약 600여 개의 근육 중 사용하는 부위 매우 제한적.’

지나치게 단순한 신체활동에 비해 우리의 머릿속은 늘 복잡하다. 육체노동이 사라진 자리를 정신노동으로 메우면서 세상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과한 육체노동은 육체의 병을 불러오듯이 과한 정신노동이 정신병을 불러오고 있다는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해도 되겠지.

육체노동을 해야 되는 직업에 대한 평가도 비정상적이다. 나만 해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공사판에서 막노동 하게 된다’는 얘기를 경고처럼 들으며 커왔다. 몸을 쓰며 일하는 것 자체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배워온 것이다. 야무지게 괭이질을 할 수 있는 팔뚝이나 볏단을 들어올리는 강한 허리 힘보다, 근의 공식을 척척 풀어내는 똘똘한 머리가 더 잘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잘못 되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부자연스러운 일임은 틀림없다.

그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러니까 고지혈증과 동맥경화, 자율신경불안정 증후군, 요통과 고혈압을 떨쳐내기 위해 우리는 운동을 따로 하고 있다. 육체노동은 옳고 돈을 내고 운동하는 건 그르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엇이 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행위인가를 되짚어 볼 필요는 있겠다. 나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고 생각했고, 노동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건강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찾아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노동을 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흙을 만지고 풀을 만지면서 움직이고 싶은데 이 도심한복판에서 당장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작은 일부터 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설거지와 같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하고 나면 조금이라도 상쾌한 기분이 드는 일들이다. 빨래도 그렇고 음식물 쓰레기나 분리수거도 마찬가지다. 모두 일거리이고 노동이다. 한없이 게으르고 싶은 주말 아침, 그런 것들이라도 해치우고 나서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면 쓸모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떨쳐낼 수 있다.

한번은 집안이 말끔히 치워져 있는 탓에 너무 할 일이 없어 나가서 거리의 쓰레기를 주워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 앞에 나가보니 과연 거리마다 과자봉지나 담배꽁초, 전단지가 꽤 쌓여있었다. 어디서든 할 일은 많았던 것이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언제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올지 모르는 일이다. 만일 어느 날 피자가게 앞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청년을 발견한다면 그저 사무치게 육체노동이 그리운 회사원인가보다, 라고 생각해주길. 

                                                                 ♦

우리는 모두 동물動物이다. 왜 움직이는가가 곧 삶의 목적이다. 헬스클럽이나 농어촌이나 모두 살기 위해 뛰어다니는 전장이지만, 운동과 노동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내 몸 하나 돌보자고 뛰어다니면 그것이 운동이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 움직이면 그것이 노동이다.
아, 그만 쓰고 빨리 가서 설거지해야지.
 

외계인이 회사원의 하루를 관찰한다면 이런 보고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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