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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한때 내게는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명백한 분노조절장애였다. 평소에는 순하고 소심한 주제에 한번 화가 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병이었다. 얼마나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지를 보자면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인데, 나는 뚱뚱하고 음침하여 침 좀 뱉는다는 친구들의 먹잇감으로 딱 이었다. 입학하고 일주일이 다 지나기도 전에 학급 내에서는 계급이 정해졌다. 각 학급의 짱이 정해지고, 그 밑으로 순서대로 지위가 정해지더니 종국에는 나에게도 자리가 주어졌다. 학급의 힘 있는 무리들을 위해 궂은일을 하게 된 영광이 주어지자 나는 얼마간 매일같이 악몽을 꾸기도 했다.(뭐, 생각해보니 악몽이 대수일까.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아무튼 그랬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는 잔혹성을 몇 시간이고 설명해줄 수 있다. 그 만큼이나 나는 14살짜리들 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잔인함에 매일을 보냈다.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타인에게 둔감하고 스스로에게는 몹시도 예민했었는데, 그것은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를 버티다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참다못한 내가 화를 내버린 것이다. 흡사 발작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나의 화낸 뒤 기억은 선명하지만 단편적인데, 그것들을 좀 보자면 눈은 충혈 되고 이는 너무 악다물다 못해 부서질 듯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계속 이야기를 하자면 그 간의 화를 토해내듯 연신 “씨발새끼”와 “죽여 버린다.”를 외쳤다. 마치 1킬로 밖에 떨어진 철천지원수에게 말하듯이 말이다. (순해빠진 놈이 할 줄 아는 욕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니 씨발새끼를 죽인다는 당연한 욕만 한 것이다.) 그리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돌아오니 나는 멍한 표정으로 교무실에 있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천 원짜리 커터 칼을 드는 치기가 귀엽다지만 그때는 그것이 광기였다. 그게 나의 첫 분노조절장애를 고백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참아내다 두 눈을 희번뜩거리며 발작하는 일은 반복되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또는 습관처럼 말이다.

 새삼 궁금했다. 잘 참다가도 나를 순간 발광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도록 참았고 다혈질이라 하기에는 내성적인 모습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용은 커녕 이무기도 되지 못한 나에게 역린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었다. 지금이야 지랄발광(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만큼 정확하게 어울리는 표현이 없다.)이 차츰 사라져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또 다시 저질러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철 지난 고민으로 한참을 생각하는데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그게 중요했으니까 그랬겠지.”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바보 같고 둔하고 무신경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꼭 이런 순간이면 폐부라도 찌를 기세로 예리하고 총명해진다. 맞는 말이다. 그때 내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따돌림을 당하거나 맞거나 무시를 당하더라도 다 참아냈다. 겁이 나기도 했고, 버틸 만도 했다. 참을 만하니 참았다. 그러나 내가 꿈꾸는, 바라는 것들을 이야기했을 때, 예를 들자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가, 복싱선수가 되겠다와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이 무시당하는 순간 나는 두 눈의 흰자위가 다 드러나도록 분노한 것이다.

 아마도 나는 불안했던 것 같다.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부정당하니 불안감이 터져 나오면서 온 감정을 다 휩쓸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온 감정이 뒤섞이어 새빨간 분노가 아니라 한없이 탁하고 검붉은 분노가 쏟아져 나온 거다.

 이제 와서 누가 내게 너는 선생님이 될 수 없다, 복싱선수도 될 수 없다 한들 아무 감흥도 되지 못하는 것은 어쭙잖게나마 교단에도 서보았고, 링 위에도 올라보아서일 것이다. 이제는 자신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니까. 내가 모든 분노, 특히나 이처럼 검붉은 것으로부터 무관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발작의 전조를 스스로 살필 수 있게 되어 반갑다는 것이다.

 요즘은 다들 울화가 필수품이라도 되는 마냥 품고들 산다. 터져 나오는 화를 내보이는 것이 일부를 넘어 유행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나 또한 발작하는 사람 중 하나라 할 말은 없다만, 적어도 어디서 오고 있는지를 짚어보았으면 한다.

 무작정 희망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내일을 두고서 나아질 것을 막연히 바라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불안을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교사가 되지 못한다는 말에 하늘이라도 무너지듯, 인생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던 나는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단지 교사가 되지못할 뿐이었는데 말이다. 무엇으로 불안한지 제대로 볼 줄 몰랐던 탓이다.

 ‘교사가 되지 못하면, 나는 절망할 테고, 그로 인해 실패에 거듭 익숙해지어 끝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폐인이 되고 결국 무엇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살다가 죽고 말겠지.’ 그럴 리가. 한때는 이렇게도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나.

 화내지 말자. 아니, 화를 낼 때는 내더라도 왜 화를 내는지 모를 지경까지 화를 내지는 말자.  불안감에 매달려 악을 쥐어짜내는 일은 없도록 하자. 

 추신, 광장의 분노가 가라앉았을까. 그리 보였다면 분노가 가라앉았다기보다 막연한 불안감이 걷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서가 아닐까. 사실은 그게 더 중요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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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