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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Behind & Beyond] ‘엄지발가락의 기적’ 일군 박운서

‘엄지발가락의 기적’이란 제목의 칼럼을 읽은 게 2016년 1월 5일이었다.

박운서라는 이의 사연이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는 통상산업부 차관,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 데이콤 회장을 지냈다.

정년퇴임 후 필리핀의 오지 민도로 섬에 교회 14곳을 세우고,

원주민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며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런 그가 2015년 4월 19일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5월 2일 서울로 후송됐다.

의식불명인 채였다.

수술 후에도 몇 달 동안 한국인지 필리핀인지 분간을 못하는 섬망증상에 시달렸다.

그가 의식을 찾았을 땐, 양쪽 무릎과 정강이에 철심이 박히고,

요도엔 평생 달고 살아야 할 도뇨관이 있었다.

오른발엔 엄지발가락만 남아 있었다.

그는 하나 남은 엄지발가락을 두고 다행이라고 했다.

그마저 없었다면 목발을 짚고 서기도 어려웠을 것이라 했다.

‘단순히 발가락 하나가 온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시 일어서서

봉사와 선교의 땅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기적’이라는 게 칼럼의 내용이었다.

그 칼럼을 읽은 후 한 장의 사진이 머리를 스쳤다.

오래전 봉사활동을 위해 필리핀 오지로 떠난다는 이를 인터뷰한 적 있었다.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여 기억 속의 사진을 찾았다.

박운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게 2005년이었다.

당시 그는 공직생활과 최고경영자의 이력을 뒤로한 채 남은 인생을

필리핀 원주민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 10년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땅을 구입하여 공동농장을 운영하고, 학교와 예배당도 지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믿거나 말거나일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딱 10년이었다.

10년 계획으로 떠난 그가 의식불명인 채로 한국에 돌아온 게….

그리고 그 칼럼으로 판단컨대 그는 10년 전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그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상의는 내복, 하의는 환자복 차림에 깡마른 그가 책을 보고 있었다.

녹록하지 않았던 10년간의 봉사 이야기와 처참한 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는 웃었다.

그 웃음에 용기를 얻어 사진을 한 장 찍자고 부탁했다.

“제가 가진 재주가 사진 찍는 재주뿐이니 사진 한 장 찍어 드리겠습니다”

“영정사진하면 되겠네.”

“그런데 제가 영정사진이라고 찍으면 잘 안 돌아가시더라고요.”

“그러면 더 좋지”라며 시원스레 웃었다.

그가 보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매일 죽는다』는 제목의 신앙 고백록이었다.

얼굴 사진을 찍은 후, 발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여줬다.

왼발보다 유독 가느다란 오른발, 여기저기 수술 자국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엄지발가락 하나가 달랑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다시 설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설 수 있으니 다시 가야 한다고 했다.

달랑 하나 남은 엄지발가락, 그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2016년 5월 25일, 다시 가겠다는 다짐대로 그는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e메일로 안부를 물었더니 답이 왔다.

“병원에서는 1년 더 한국에서 조리하고 가라고 했는데 무리해서 사후치료 자재와

약을 소지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 같으나

부지런히 재활운동하고, 현장 사역을 이리저리 간섭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 지인이 문자 메시지로 그의 소식을 전해왔다.

‘필리핀 박운서 장로가 제 3의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원주민 아이들의 교육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뜻을 함께하실 분들은 동참 바랍니다.’

하나 남은 그의 엄지발가락이 다시금 떠올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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