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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특검은 스파이가 아니다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로버트 아인혼 전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보의 방문을 받은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참모인 아인혼은 한국 일각에서 제기되는 핵무장론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어리석은 선택이고, 단호히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짓궂은 생각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의 한국·일본 핵무장 용인 발언을 거론하고 “미국이 걱정”이라고 건드려 봤다. 그는 “트럼프가 당선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정색한 뒤 “대통령이 돼도 미국의 시스템이 제어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아인혼의 첫 번째 예측은 빗나갔다. 두 번째 예측도 적중 여부가 불확실하다. 이슬람 7개국 국민의 입국을 일시 제한한 트럼프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법무장관 대행이 반기를 들자 트럼프는 한밤에 전격 경질했다. 법원은 집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미국 히틀러’의 난폭운전은 여전하고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희망적인 것은 미국은 시스템으로 권력의 폭주를 중단시킨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1974년 7월 24일 연방대법원은 워터게이트 사건 축소·은폐 혐의를 받고 있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스모킹 건(smoking gun·결정적 증거)’인 백악관 집무실의 녹음테이프를 특검에 제출하라고 결정했다. 닉슨 측이 “대통령과 보좌관의 대화는 비밀이 보장돼야 원활하고 효과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며 주장한 면책특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워런 버거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4명이 닉슨에 의해 지명된 인물이었지만 결정은 8대 0으로 내려졌다. 녹음테이프에선 닉슨이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저지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상원의 탄핵 결의를 앞둔 8월 8일 닉슨은 사임을 발표했다.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던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닉슨이 해임하는 과정은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었다.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특별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던 공화당 출신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닉슨의 해임 지시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부장관까지 불복하고 물러나자 닉슨은 차관을 ‘대대행’으로 임명해 밀어붙였다. 윌리엄 색스비 후임 법무장관은 레온 야보르스키를 새 특별검사로 임명하면서 수사 독립성 보장을 약속했다. 야보르스키도 전임자처럼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닉슨이 연방대법원에 항소해 마지막 반전의 희망을 걸었지만 허사였다. 미국의 시스템이 대통령 권력의 일탈을 다스린 것은 사법부와 행정부가 임명권자와 정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양심에 따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혼돈의 상태다. 광장에선 촛불과 태극기 집회가 대통령 탄핵을 놓고 찬반 대결을 벌이고 있다.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은 거부됐다. 청와대는 형사소송법의 ‘군사상 비밀을 요하는 장소’라는 이유를 댔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내 책임 권한범위 밖에 있다”고 발을 뺐다. 특검은 서울행정법원에 청와대의 압수수색 불승인을 취소해 달라는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사인(私人)인 최순실이 무단으로 드나든 공간에 국가가 부여한 정당한 직무를 수행하려는 특검은 들어가지 못하는 기이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특검이 군사비밀을 빼내는 스파이라는 것인가.

법원이 발부한 적법한 압수수색 영장 집행을 청와대가 거부하는 것은 헌법의 삼권분립과 영장주의를 무시하고 공무 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다. 대통령이 떳떳하다면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압수수색에 응하는 게 백번 맞다. 압수수색과 대통령 대면조사가 이뤄진다면 국정 농단과 ‘세월호 7시간’을 둘러싼 소모적 논란은 명쾌하게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시중에는 온갖 루머가 난무하고 있다. 지명권자에 따라 재판관들이 정치권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들린다. 그래서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퇴임으로 현재의 8인체제가 7인체제로 전환되는 3월 13일 이후에는 6인 이상의 찬성으로 인용되는 탄핵 결정이 어려울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어떻게든 헌재를 흔들려는 세력들의 마타도어다.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사안을 ‘사법적’으로 해결하라고 해서 헌재가 떠안은 것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이다. ‘사법적’ 판단에는 정치적 타협이나 사적 감정이 개입할 수 없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닉슨이 지명한 대법관이 4명이나 있었지만 만장일치로 닉슨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민주적 가치를 지켰다. 헌재든 행정법원이든 사법부는 법률과 양심에 따라 국가적 혼돈을 정리하면 된다. 우리의 사법시스템이 미국 못지않게 건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취약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사법정의가 지켜내기를 기대한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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