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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보수는 완고한가

김진국 칼럼니스트

김진국
칼럼니스트

1987년 민중 후보로 나선 백기완씨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의 동시 출마가 굳어진 뒤다. 재야마저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단일화 추진, 독자 후보론으로 갈라졌다.

은평구 기자촌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최열·임진택·김도연씨 등 재야의 선거참모들이 좁은 집에 모여 있었다. 인터뷰에 앞서 비공개할 테니 한 가지를 솔직하게 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보기관 공작으로 출마한다는 말이 있다. 야권 표를 분산시키려는 거냐, 결국 될 사람을 밀어줄 거냐.” 백 후보는 “나를 믿으라”고 했다. 결국 백 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고 중도 사퇴했다.

보수는 부패해서 망하고, 진보는 분열해서 망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최근 한국 정치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정확한 분류는 아니지만 흔히 통용되는 대로 현재의 여권과 야권으로 생각해보자.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의 연이은 실패,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내내 괴롭힌 이·박 갈등은 보수가 무엇으로 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야권은 반(反)분열로 움직여왔다. 선거 때마다 후보 단일화를 당연시했다. 총선에서는 연합공천까지 추진했다. 87년 양김 분열이 뼈아픈 교훈이 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전략적 투표’다.

김대중 정부 말 후계자로 기정사실이 돼 있던 이인제 후보는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뒤집혔다. 31.3% 대 37.9%. 불과 사흘 전 광주 지역 여론조사에서도 이인제 47.6%, 노무현 21.5%였다. 더블 스코어다. 경선 전인 3월 이회창 후보가 46.5%으로 대세를 형성한 반면 노무현 후보는 1~2%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극적이다.
이런 전략적 투표에는 고도의 인내력이 필요하다. 자신과 다른 생각, 이해관계와 동거할 수 있는 관용이다. ‘차선(次善)’ 혹은 ‘차악(次惡)’을 선택해 최악(最惡)은 피하겠다는 지혜다. 당시에는 ‘누가 표의 확장성이 있느냐’ ‘누가 이회창 후보를 더 확실히 꺾을 수 있느냐’를 저울질해 표를 몰아줬다. 특히 이런 전략적 투표는 광주 지역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톨레랑스를 의미하는 관용은 민주주의의 기초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다른 생각들과 동거하고, 대화하고,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이 민주정치다.

관용이 없으면 확장성도 없다. 타협할 줄 모르고 자기 고집만 하면 소수로 고립된다. 집권할 수도, 자기 정책을 반영할 수도 없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 전체주의다. 세상에 옳은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다. 다른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다른 생각을 담은 책은 불질러버렸다. 지극히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 국민은 교육의 대상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민회·조선민족청년단(족청)·대한청년단·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와 정치깡패인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이 설쳤다. 우마차로 ‘우의(牛意)’ ‘마의(馬意)’가 동원됐다. 국회의원을 헌병대로 끌고가 폭행하고, 경찰과 군대가 국회를 포위한 채 개헌안 표결을 했다. 국회의원들이 민의를 배신했다며 원외 자유당을 만들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 곪은 부분을 도려내야 살아날 수 있다.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이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건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감추고, 비호하다 결국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태극기 집회를 보면 걱정이다. 이 땅의 보수를 정말 사라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하는 것도, 대통령과 비선 실세가 대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것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인을 지원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냐고 항변한다.

검찰의 수사 결과, 법원의 판단마저 모두 부정한다. 특정 언론이 아니다. 모든 언론이 한목소리로 지적한 것을 조작이라고 몰아세우고, ‘가짜뉴스’와 일인 미디어를 보고 자위한다. 어쩌다 보수가 이런 지질한 모습으로 바뀌었나. 그런 보수라면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미래가 없다. 사실을 말해야 한다. 솔직해야 한다. 인정할 건 하고, 반성할 건 하고, 자를 건 빨리 잘라내야 새살이 돋는다.

30년 전, 6월항쟁이 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다. 강철정치를 하던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후보가 자신을 밟고 가도록 했다.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노 후보의 공적으로 포장해줬다.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다. 이제 보수에선 그 정도의 희생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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