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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치정 멜로의 동력은 질투

2014년, 자전적 데뷔작 ‘거인’에서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생존을 위해 성장을 포기해야 했던” 10대 시절을 고해한 김태용(30) 감독. 두 번째 장편 ‘여교사’

(1월 4일 개봉)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자존감을 포기한” 어느 계약직 교사의 열등감을 극단적인 파국으로 빚어냈다.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 칭찬과 인물들의 감정을 쫓아가기 힘들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이도 저도 아니게 잊히고 말 영화로 만들기는 싫었어요. 조금 불친절하더라도, 애초의 의도를 직설적으로 밀어붙이고 싶었죠.” ‘여교사’ 개봉 후 극과 극으로 엇갈린 관객 반응에 대한 그의 솔직한 답변이다. 저예산 영화지만, ‘김하늘’이라는 톱스타를 캐스팅한 만큼 대중성에 대한 딜레마도 겪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감독으로서 그가 수없이 마주했던 질문이다.
열여덟 살 남학생을 둘러싼 정규직 교사와 비정규직 교사의 삼각관계. 언뜻 봐서, 김 감독의 외모는 치정 멜로영화와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일지 모른다. 아담한 체구에 미소 띤 얼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툭 진심을 털어놓는 사람. 농담처럼 슥 던진 진심이 때때로 너무 묵직해서 놀라게 하는 사람. 김태용은 그런 감독이다. “한국에서 감독으로 자리 잡으려면, 하루빨리 상업영화를 내놓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저 스스로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기니까, 외려 상업영화에 대한 강박 관념이 심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여전히 너무 깊고 어두운데, 누가 내 세상을 사랑해 주지?’ 이런 회의가 있었죠. ‘아직 나이가 젊으니, 조급해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쓰기 시작한 게 ‘여교사’ 시나리오였어요. 독립영화를 탈피한 첫 작품이잖아요. 제 색깔을 강하게 보여 주면서, 더 많은 관객이 호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이번 영화의 어려운 숙제였죠.”
 
일상의 계급 문제를 그리다
성장영화 ‘거인’ 이후 의외로 청춘 남녀가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 연출 의뢰가 많았다는 김 감독. 평소 “일상적 사건으로 시작되는 사회 고발 스릴러를 좋아한다”는 그는 직접 차기작 구상에 착수했다. ‘교사’라는 직업에 눈길을 둔 건, 우연히 리처드 이어 감독의 ‘노트 온 스캔들’(2006)을 보게 되면서였다. 이 영화는 영국 학교의 나이 든 교사(주디 덴치)가 젊은 교사(케이트 블란쳇)의 금지된 밀회를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치정 스릴러다. 김 감독은 제63회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단편 ‘얼어붙은 땅’(2010)을 만들 즈음부터 “유럽이나 미국 선댄스영화제풍 영화를 한국 정서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계급 문제가 가장 심하면서, 수면 아래 묻혀 있는 곳이 교권이잖아요. 요즘은 선생님이 화만 내도 학생들이 동영상을 찍어 온라인에 올려요. 학교 안팎에서 모범을 강요받는 교사들은 어디에 감정을 표출할까. 그게 ‘여교사’의 출발점이었죠.” 김 감독의 말이다.

약자의 시선에서 그린 ‘계급’은 김 감독이 매 작품마다 구축해 온 세상의 틀과 같다. 그는 단편 ‘복무태만’(2011)에서 공익근무요원과 택배 기사라는, ‘을(乙)’들의 복장 터지는 갈등을 그렸다. 이 영화로 제10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비정성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해 대표 집행위원이던 류승완 감독과 오랜 인연을 맺게 됐다. ‘여교사’가 류 감독과 강혜정 대표의 영화사 외유내강이 제작한 “첫 멜로이자 여성 영화”가 된 사연이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계급 문제를 정치판 같은 큰 규모로 그리잖아요. 근데 일상에서 벌어지는 계급 문제가 더 첨예하거든요. ‘여교사’ 오프닝신에 나오듯, 비정규직 교사가 임신·육아 휴직을 쓰려면 ‘퇴직하라’는 식의 차별을 겪게 되죠. 직장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취재하다 너무 충격받았어요.”
 
김하늘의 낯선 얼굴
‘여교사’를 구상하며 그가 몰두한 것은 계급 차가 유발한 질투와 열등감, 그 자체였다. ‘거인’의 영재(최우식)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살아갈 의미도, 희망도 찾지 못했다면? 성별과 이름이 다를 뿐, 어쩌면 ‘여교사’의 효주(김하늘)는 바로 그런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거인’에서 원망과 자책으로 소용돌이치던 영재의 내면을 촘촘한 일상에 실어 냈다면, ‘여교사’는 친절한 서사보다 효주의 감정이 자아내는 파국에 더욱 촉각을 세웠다. 10년 사귄 애인(이희준)과 지지부진한 관계인 효주가 발레 특기생 재하(이원근)에게 품는 미묘한 설렘, 재하와 육체적 관계를 맺은 또 다른 교사 혜영(유인영)에게 느끼는 질투와 열등감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혜영은 효주가 계약직 화학교사로 근무하는 사립고등학교 이사장의 딸이자, 효주가 간절히 바라던 정규직 자리를 낚아채는 ‘낙하산’ 교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효주의 대학 후배다. 효주로선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권태와 피로로 벼랑 끝에 몰렸던 효주가 혜영의 등장으로 오히려 기이한 생기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사랑스럽고 새침한 이미지로 익숙했던 김하늘에게서 낯설고 예민한 얼굴을 끌어냈다’고 평가받는 건 그 때문. “(김)하늘 선배가 ‘김은숙(드라마 작가)의 여자’잖아요. TV 드라마 ‘온에어’(2008, SBS)에서 엄청 예민하고 까칠한 연기를 했어요. 질투와 사랑, 의리 같은 감정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약한 모습이 좋았던 것 같아요. ‘로망스’(2002, MBC)에서 이어져 온 ‘국민 교사’ 이미지도 뒤집어 보고 싶었고요.”

 
‘여교사’에 대한 엇갈린 반응에 대해
혜영 역시 통속적인 ‘부잣집 악역’은 아니다. 착하고 해맑은 그는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는 효주를 “좋아했던 선배”라며 살갑게 따르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외모도 출중한데 부자고, 성적도 좋은 데다 심지어 착하기까지 한 친구들이 제일 얄미웠어요. 그 사람을 질투하는 제 모습에 오히려 더 자격지심이 생기니까. 인간 김태용으로서 느낀 열등감을 총집합해 ‘혜영’이란 인물을 상상해 냈죠.”

그런데 문제는 혜영을 비롯한 주변 캐릭터들이 자주 설득력이 부족한 인물처럼 비친다는 사실이다. 효주의 심리 묘사를 부각하기 위해 편집 과정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들을 덜어 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며 남은 것은,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과 상황뿐이다. 어떤 관객에게는 ‘여교사’가 ‘파격적인 문제작’이기보다 ‘이해하기 힘든 괴작’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삼각관계의 한 축을 이루는 재하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다. 효주에게 그는 혜영으로부터 빼앗고 싶은 존재이자,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자존감이 바닥난 사람들은 상대에게 뭔가 베푸는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 한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 그러나 정작 재하의 속내를 설명해 주는 대목은 충분치 않다. 그의 존재감이 드러났을 정사신도 “선정성에 너무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영화에서는 시나리오에 비해 짧게 처리됐다.

결과적으로 재하와 혜영이 효주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기능적 장치처럼 느껴졌다고 하자, 김 감독은 “어쩌면 이 영화에 그려진 재하와 혜영이 효주의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해외 영화제에서는 오히려 혜영에게 환호하며, 장르 영화처럼 즐기는 관객이 많았어요. 제 연출작 중 ‘여교사’만큼 호불호가 엇갈린 영화도 없는 것 같아요.”

 
고단했던 과거를 딛고 삶의 의지를 얻다
김 감독이 ‘여교사’로 확고한 인상을 심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성취다. 그러나 “다음에 만들 상업영화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차기작은 어떤 영화일까. “아직 밝히기 힘들다”며 그가 슬쩍 귀띔했다. “켄 로치 감독이 지난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제69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세상에 영화로 희망을 이야기할 의무가 있다’고요. 그를 비롯해 장 피에르·뤽 다르덴 형제, 우디 앨런 같은 감독들처럼 좀 더 넓고 관대하게 세상을 보고 싶어요. 제가 우울할 때마다 꺼내 보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임순례 감독) 같은 영화처럼요.”
`여교사` 촬영 현장

`여교사` 촬영 현장

‘거인’에서 드러났듯 그는 가족과 왕래를 끊은 지 오래다. 부모를 두고도 남의 집 살이를 해야 했던 고단한 기억은, 그를 “평생 부모를 원망하는 힘으로 버티게” 했다. 가족과 화해할 마음도 먹은 걸까. “(김)하늘 선배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이런 (30대 여성 교사의) 이야기를 썼느냐’고 물었을 때, 저도 모르게 ‘요즘 엄마 생각을 많이 한다’고 답했어요. 엄마가 저를 낳은 게 딱 제 나이 때였거든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들을 그 시절 엄마도 느꼈을 텐데…. 젊은 시절 엄마를 더 이해하고 안아 주고 싶은 마음들이 시나리오에 포함된 것 같아요. 주인공 효주를 통해서.”

‘거인’의 최우식, ‘여교사’의 김하늘처럼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를 뒤집어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는 연출에서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김 감독. 그는 “김수현·유아인·박서준 같은 또래 남자 배우들과 파이팅하는 영화 촬영 현장도 즐거울 것 같다”고 했다. “요즘 같은 시국일수록, 평범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힘이 큰 것 같아요. 삶의 의지를 자극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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