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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나는 정유라를 신고했을까

이상언 사회2부장

이상언
사회2부장

천신만고 끝에 그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그는 국민이 주목하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고 있기도 하다. 온종일 기다려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자 밖으로 새어 나오던 말소리도 끊겼다. 커튼 틈마저 사라져 안의 사정은 알 길이 없다. 안에는 수배자 외에도 여러 명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이 나를 몸으로 막는 사이에 수배자는 차를 타고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그는 더욱 꼭꼭 숨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어설픈 추적으로 수사기관의 체포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떠오른 선택지는 둘뿐이다. 첫째는 계속 기다리며 문 밖에서 간간이 큰 소리로 설득해 보는 방법이다. 성공 확률은 크지 않다. 나는 머지않아 화장실에 가야만 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다 잠이 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 사이에 그가 달아난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다. 시간은 결코 내 편이 아니다. 둘째는 경찰에 신고해 수배자를 체포하도록 돕는 일이다. 온 국민이 주목하는 사건의 실체를 알리는 데 기여할 인터뷰는 포기해야 하지만 그의 현재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나라의 혼란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JTBC 기자는 덴마크의 정유라씨 은신처 앞에서 현지 경찰에 전화를 하기 전에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따로 물어 본 적은 없지만 기자라면 누구라도 번민했을 상황이다.

그 뒤 지금까지 “큰일 했다” 등의 그에 대한 찬사가 자주 들려온다.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다. 정씨가 ‘부모 돈도 실력이다. 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글을 쓴 대학 부정 입학자라서 공분을 사고 있다는 점도 작용한 듯하다. 비판자들은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기자는 객관적 기록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약 기자가 신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순간부터는 일반 시민의 입장이 돼 더 이상 취재는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체포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것을 문제 삼는 주장이다.

기자의 객관성 또는 중립성은 당연한 덕목처럼 보이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취재 대상 선정, 보도 우선 순위 결정, 보도 내용 구성 등 국면마다 기자 개인과 언론사 간부의 주관이 개입한다. 해외의 많은 언론사는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이념을 공개하고 있기도 하다.

기자는 기록자 또는 관찰자에 머물 수 없는 상황과 종종 부닥친다. 2015년 9월 터키 해안에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소년 쿠르디가 숨진 채 발견돼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사진 한 장으로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당시 29세의 터키 통신사 여기자 닐류페르 데미르였다. 그는 “아이를 얼른 안아 숨이 붙어 있는지부터 확인했어야지 어떻게 카메라 셔터부터 눌렀느냐”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기자 이전에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물음이다.

기자는 범법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가 수배자임을 알고 있는 때도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조직폭력배 등 중죄인도 취재의 대상이 된다. 진실의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서다. 이 조각은 때로는 수사나 재판으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사실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경우 기자는 그의 소재 정보를 수사기관에 건네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범죄인을 찾아간 기자들이 감금이나 폭행 또는 그 이상의 해를 입어 언론의 역할이 꾸준히 위축돼 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테러범을 만났고, 그가 대중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살상을 곧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신고밖에 선택 사항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결국 원칙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기준을 제시해 본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기자도 한 명의 보통 시민 역할을 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미국 법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에게 도덕적 의무를 강제할 때 활용한 개념이다. 이에 비춰 본다면 정씨 신고 문제에는 어떤 답이 나올까. 내가 덴마크 현장에 있었다면 계속 기다리는 쪽을 택했을 것 같다.

이상언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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