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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식 쌀국수, 숙주 없이 먹는 재미

| 베트남 현지식 포(Pho) 인기

뜨끈한 국물이 그리운 계절이다. 출출할 때나 술 마신 다음날,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베트남 쌀국수집이다. 그때마다 개운한 국물 맛을 더하고 싶어 “숙주 많이”를 외친다. 그런데 요즘은 숙주를 아예 안 내거나 원하는 손님에게만 제한적으로 주는 집이 늘고 있다. 숙주 없이 쇠고기육수 자체의 깊은 맛을 즐기는 쌀국수, 이른바 ‘하노이 스타일’이 요즘 대세다.


 
베트남 쌀국수집‘에머이’(종각점)의 포(Pho)는 하노이식을 표방한다. 숙주를 넣지 않고 24시간 이상 사골과 양지로 우려낸 육수와 생면만으로 깊은 맛을 즐기는 게 특징이다.

베트남 쌀국수집‘에머이’(종각점)의 포(Pho)는 하노이식을 표방한다. 숙주를 넣지 않고 24시간 이상 사골과 양지로 우려낸 육수와 생면만으로 깊은 맛을 즐기는 게 특징이다.


“쌀국수 나왔습니다.” 탁자에 내려놓은 그릇이 단출하다. 넘칠 듯 찰랑거리는 육수에

폭 파묻힌 면, 그 위에 얹힌 토핑은 다진 실파와 채 썬 양파가 전부다. 사이드디시로 곁들인 것도 절인 마늘과 단무지, 채 썬 고추뿐이다. 쌀국수 집에서 수북이 내놓는 숙주는 물론, 고수나 양파절임도 없다.

“쇠고기 육수를 진득하게 우린 거라 잡다한 걸 넣으면 국물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어요.”

지난달 22일 서울 종각역 근처 뒷골목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집 ‘에머이’에서 “숙주는 안 주세요?” 하고 묻자 권영황 대표가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8월 문 연 에머이는 베트남 쌀국수 가운데서도 북부 하노이 스타일을 표방한다. 하노이 인근 남딘에서 3대째 운영해온 쌀국수 집의 계승자를 삼고초려 끝에 데려와 주방을 맡겼다. 사골과 양지를 24시간 이상 우린 육수와 가게 2층에서 직접 뽑은 생면이 이집의 핵심이다. 웨스틴조선호텔 셰프 출신인 권 대표는 “2011년 하노이에서 맛 본 쌀국수가 한국에서 먹었던 쌀국수 맛과 전혀 달라서 2년 간 하노이식 육수 맛을 내기 위해 연구한 끝에 식당을 차렸다”고 말했다. 에머이는 지난해 10월 가로수길 2호점에 이어 최근 동대문에 3호점을 열었다.

지난 8월 대학로에 1호점을 연 하노이식 쌀국수 체인점 ‘포세븐’에선 아예 ‘하노이 쌀국수는 숙주와 함께 먹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을 걸어 놨다. 주문부터 음식 수령, 식기 반납까지 모두 셀프로 이뤄지는 이곳은 홀 한쪽에 각종 양념과 고수 등 향신채를 놓아두는데 여기에도 숙주는 없다. ‘아삭한 식감을 꼭 원하시면 (주방에) 숙주를 요청할 순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포세븐을 운영하는 오리엔탈코리아의 전성진 조리개발부장은 “단순한 마케팅 포인트가 아니라 실제로 하노이 식은 숙주 없이 즐겨야 육수 본연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소고기를 중심으로 깊게 우려낸 육수는 우리 식으로 따지면 사골곰탕 같은 건데 여기다 숙주를 넣으면 맛을 버린다는 논리다.

하노이 식 쌀국수엔 향신료나 향신채도 많이 쓰지 않는다. 전 부장은 “육수를 만드는 단계에서 팔각·정향 등을 첨가해 고기 잡내를 잡는 정도”라며 “실제 하노이의 유명 쌀국수 집들도 허브 향이 그렇게 세지 않다”고 말했다.


 
보트피플이 퍼뜨린 포, 한국선 해장용
전통 문양이 그려진 그릇 등 현지 느낌을 최대한 살린 베트남 쌀국수집이 대세다.

전통 문양이 그려진 그릇 등 현지 느낌을 최대한 살린 베트남 쌀국수집이 대세다.


베트남 왕조 시대 1000년 가까이 수도였던 하노이는 쌀국수, 즉 포(Pho)의 고향이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 시절, 하노이 인근 남딘에서 프랑스식 식문화와 중국식 면이 만나 포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음식언어학자들은 ‘포’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의 포토푀(pot au feu·쇠고기와 뼈를 채소 등과 함께 고아서 만든 육수)가 현지 식으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북부에 정착한 포는 2차 대전 후 공산정권을 피해 남하한 이들을 따라 남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기후와 지형의 영향으로 식자재가 풍부한 남베트남에선 육수를 만들 때 닭고기를 추가하고 큐민·바질 같은 향신채를 훨씬 많이 사용하는 등 남부 스타일을 입혔다(웹사이트 ‘러빙포닷컴(LovingPho.com)’과 그레이엄 홀리데이가 쓴 『맛있는 베트남』 참조).

오랜 내전 끝에 1975년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재 호치민)이 함락되고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하면서 수십만 보트 피플이 자유를 찾아 해외로 떠났다. 이들이 해외에 정착한 주거지엔 ‘리틀 사이공’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미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가 대표적이다. 1980년대 이 일대에 수많은 포 음식점이 생겨났다. 남부에서 건너온 이들의 특성상 이곳의 쌀국수는 남부스타일이 주를 이뤘다.

한국에 소개된 포 역시 이 영향을 받아 남부 스타일을 따랐다. ‘호아빈’ ‘포호아’ ‘포메인’ 등 대부분의 체인형 쌀국수집이 이에 해당한다. 게다가 한국에서 포는 ‘한국식 변형’을 겪었다. 2002년 대학로에 문을 열어 현재는 종로 관철동으로 옮겨간 ‘빠리하노이’ 이찬주 대표는 한국의 초창기 포 문화를 이렇게 증언한다.

“1990년대 말 강남에 쌀국수집들이 열었을 때 '포호아' 등 체인점들은 24시간 영업을 했어요. 근처 클럽에서 밤새 놀던 젊은이들이 해장용으로 즐겨 찾았는데, 숙주를 많이 넣어 시원한 국물로 먹었죠. 한국식 포에 숙주가 필수가 된 이유에요. 반면 고수는 향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달라는 사람에게만 주는 식이었죠.”

이 대표는 ‘빠리하노이’ 초창기에 북부 스타일을 추구했다. 하지만 손님들의 숙주 고집이 워낙 강해서 ‘숙주를 넣어도 먹기 좋은 쇠고기 육수’를 만드는 쪽으로 타협을 봤다. 그러면서도 남부 베트남식의 단맛은 피했다. 이 대표는 “한국 쌀국수집 대부분이 남부나 북부 어느 쪽을 따르기보다 한국 입맛에 맞게 변형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요즘은 손님들도 숙주를 넣지 않고 국물 자체를 즐기거나 고수 향을 좋아해서 먼저 달라고 하는 등 바뀌는 분위기라고 했다.


 
베트남 여행객 늘면서 ‘진짜 포’ 추구
숙주와 각종 허브를 수북이 곁들여 즐기는 남부 호치민 스타일의 쌀국수집 ‘호아빈’.

숙주와 각종 허브를 수북이 곁들여 즐기는 남부 호치민 스타일의 쌀국수집 ‘호아빈’.


최근 하노이를 내세우는 집들은 ‘이게 원조’라는 논리를 펼친다. 냉면의 원조 격인 평양냉면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평냉부심’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작 베트남인들은 하노이·호치민식 구별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주한베트남대사관 3등 서기관 쩐 수안 투이는 “총 길이 1700km에 64개 성으로 이뤄진 베트남에선 지역마다 다양한 포를 만든다. 요즘은 북부에서도 남부식 포를 즐겨 먹을만큼 서로 섞이는 분위기”라고 했다. 다만 그는 “그동안 한국 쌀국수는 한국식일 뿐이었는데 최근엔 현지식, 특히 하노이 스타일까지 구현하는 데가 많아져 반갑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엔 실제 베트남 포의 경험자가 급증한 게 크게 작용한다. 지난해 베트남 방문 한국인은 115만여명으로 전년 대비 38%가 늘었다. 2005년 30여만명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숫자다. 국내 거주 베트남인들도 15만 명에 이르러 이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도 늘고 있다. 북촌 ‘비엣콴’, 왕십리 ‘팜티진’ 등이 맛집으로 꼽힌다.

경기도 안산 다문화음식거리에는 베트남인이 하는 식당 뿐 아니라 베트남 식자재를 파는 식료품점도 즐비하다. 이런 관심에 맞춰 11월 2일부터 5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아세안 페어 2016’에선 베트남 등 아세안 10개국 음식을 소개하는 푸드 페스티벌이 처음 열리기도 했다.

 
하노이식 대표 요리‘분짜’. 볶은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 등을 가느다란 면(bun)과 비벼 먹는다.

하노이식 대표 요리‘분짜’. 볶은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 등을 가느다란 면(bun)과 비벼 먹는다.


이에 따라 음식 명칭 또한 현지식으로 표기하는 게 일반화되고 있다. 예컨대 하노이에서 유래한 분짜(Bun Cha·가느다란 쌀국수를 센불에 볶은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허브등과 함께 소스에 찍어먹는 요리)를 예전엔 ‘돼지고기 비빔국수’라고 풀어썼지만 요즘은 ‘분짜’ 그대로 메뉴판에 올린다.

이태원 경리단길 ‘레호이’처럼 노랑·민트 등 베트남 분위기 물씬한 색채로 가게를 꾸민다든가 좁고 낮은 목재 탁자와 의자를 비치하는 것도 트렌드다. ‘레호이’는 하노이 스타일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진 않아도 북부 특유의 뭉근하게 우린 육수의 포를 낸다. 깊숙이 그리고 다채롭게, 베트남의 맛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글=강혜란 kang.hyeran@joongang.co.kr
사진=김경록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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