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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당신에게 정권을 넘길 수 있다”

전영기 논설위원

전영기 논설위원

보름 전인 11월 16일 서울과 아테네에선 두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산 엘시티 사건을 선반에서 꺼내 들었다. 물살에 떠밀려가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엘시티를 파헤치면 문재인·김무성을 잡을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그런데 문재인·김무성을 잡긴커녕 대통령의 오른팔인 현기환이 검찰에 들어갔다. 문재인은 그때부터 “즉각 하야”를 외쳤고, 김무성은 “박근혜 탄핵” 대열의 선두에 섰다. 상대를 공격한다고 서두르다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다. 적대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완고함이 박근혜의 무리수를 낳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할 일은 선거로 나라를 맡아 헌법과 법률 안에서 비전과 정책을 실천하다가 때가 되면 담백하게 내려오는 것이다. 반면 권력이란 놈은 일단 사람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욕심을 채우고 버티다 종래 끌려 내려오는 속성을 지녔다. 민주주의는 집권자에게 요구되는 공공성과 권력에 내재한 탐욕적 성질을 조절하는 인류의 오래된 매뉴얼이다. 집권자가 공공성과 탐욕성 조절에 실패해 온 사회를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게 박 대통령의 사례다. 공동체를 망가뜨리지 않고 잘 관리하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겼다는 의미에서 임기를 온전히 마친 모든 대통령은 위대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그런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민주주의, 말하자면 인간 사회의 권력 조절 매뉴얼을 오바마만큼 간결하고 쏙 들어오게 설명한 사람도 드물다. 11월 16일 오바마 대통령의 그리스 방문 때 연설의 요지는 이랬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더디고 의심스럽지만 권력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수 있어서 위대하다. 자기가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한테 정권이 넘어갈 때도 민주주의 아래서라면 안심할 수 있다.”

그는 2500년 전 돌 투성이 언덕에서 자란 아테네 민주주의가 왜 반대편 사람이 권력을 잡아도 안심할 수 있는 체제인지 얘기하고 싶어했다. “민주주의는 실수를 바로잡는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 침묵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신앙의 자유, 독립적인 사법부, 법치와 인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제도, 권력 분립 등 이런 것들이 국가권력의 집중을 막는다.”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적대 세력에게 위험한 권력이 넘어가도 안심하라는 게 오바마의 메시지다.

아테네 시민들은 “내가 응원하는 후보(힐러리 클린턴)가 언제나 이기진 않더라”는 오바마의 유머러스한 탄식에 크게 웃었다. 오바마가 발견한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손댈 필요 없이 완전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고장 나면 언제든지 세우고 수리하고, 부품이든 사람이든 갈아 끼우는 불완전한 체제였다. 권력 집중을 막고 실수를 바로잡는 민주주의의 몇 가지 요소들은 한국에서도 기가 막히게 작동했다. 언론은 최순실 국정 농단의 증거를 폭로했다. 시민의 집회는 자격 없는 권력자에게 일치된 “퇴진” 사인을 보냈다. 독립적인 사법부는 행정부에 맞서 집회의 자유를 허락했다. 대통령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법치의 원리가 살아났다.

오바마의 권력 조절 설명서 중에서 유독 ‘침묵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만은 한국 사회에 숙제로 남아 있다. 국가권력을 민간에게 넘겨준 박근혜 스캔들은 ‘침묵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무너지면서 시작됐다. 박근혜는 자기가 정해 놓은 선을 넘어 부하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강요된 침묵의 문화에서 합리적인 이유를 대고 보스와 다른 의견을 내는 일은 물정 모르는 짓이다. 그런 사람은 차츰차츰 영문도 모르게 의사결정 라인에서 배제돼 갔다. 오직 예스맨들만 생존이 가능한 생태계다. 이런 구조에서 공적 시스템을 껍데기로 만들고 속으로 사조직, 사설(私設) 정부가 활개치는 문제를 바로잡을 방법은 없다. 강요된 침묵은 박근혜 정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만나는 조직과 단체에서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우리 안의 최순실은 여기서 자라고 있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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