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국방일보] 압록강 앞두고 '인해전술' 중공군, 알고보니 같은편

압록강을 앞두고 있던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 진격을 멈추게 된다. 평양은 물론 38선까지 내주면서 후퇴를 했지만 부족한 정보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해 철수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했다. 갈팡질팡 하던 미 합참은 결국 서울도 포기하는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한다.

본격적인 중공군 참전으로 '중조연합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장진호 전투, 워커 장군 사망 등 악재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를 다짐했지만 며칠 가지 못해 다시한번 서울을 떠나게 된다. '작전상 후퇴'로 엄동설한 가운데 수많은 피난민들이 또다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이념전쟁이 만든 비극은 단순하지 않았다. '중공군' 이라 불렸던 국군의 적은 사실  중국 내부의 전통적 보수 우익, 부르주아 계층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에겐 계급적 적대세력이었다. 이들은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전장으로 쫓겨난 반공산당 세력이었다.

박용한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park.yonghan@joongang.co.kr


[국방일보 전문]

중공군 인해전술에 평택~삼척까지 ‘눈물의 후퇴’

<31> 1·4후퇴의 진상

1951년 1월 1일 중공군 3차 대공세
순식간 38선 내주고 서울 철수 명령
4일 영국군 한강 통과 후 가교 폭파
5일 중공군 곧바로 서울 무혈 입성
 
중공군, 인해전술을 군사적 목적 외
공산 반체제 인사 숙청용으로 이용
 
1951년 1월 5일 서울을 등지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 대열. [사진 연합뉴스 DB]

1951년 1월 5일 서울을 등지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 대열. [사진 연합뉴스 DB]


6·25전쟁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일방적인 수세에 몰리면서 순식간에 평양과 38선을 내주고 서울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다. 미 합참은 중공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가운데 대규모 공세를 받고 한반도를 지켜야 할지, 철수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철수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미 10군단과 미 1해병사단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다가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미군의 전투서열 1위인 1해병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흥남철수작전(1950.12.12∼24)을 통해 미 10군단은 부산으로 철수했다. 서부전선도 중공군의 2∼3차 공세로 서울 철수를 강요받았다.
 
6·25 전쟁 당시의 중공군. [사진 국방일보 DB]

6·25 전쟁 당시의 중공군. [사진 국방일보 DB]


세계 최강의 미군과 싸워 승기를 잡은 중공군은 사기가 높아졌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조금만 더 밀고 내려가면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으로 기대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낸 후 그 여력으로 유엔에 가입하겠다는 외교 전략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오판이었다.

중공군이 1∼2차 공세는 승리했지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첨단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고, 국제문제는 단순한 힘의 논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국제사회는 한반도전쟁에 불법 개입한 중공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있었으며 향후 전투상황도 예측 불허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영국군 27연대를 표창하러 가던 도중 12월 23일 의정부에서 차량 사고로 순직했다. 후퇴 중에 일어난 8군 사령관의 죽음은 미군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사기까지 떨어트렸다. 사흘 뒤 후임으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이 부임했다.

한편, 중공군은 12월 27일부터 유엔군 주 저항선에 대한 위력 수색을 강화하더니 12월 31일 북한군과 연합해 3차 공세를 시작했다. 새해를 앞두고 시작했기 때문에 신정 공세라고 부른다. 김일성도 12월 4일 ‘중조연합사령부’를 창설해 북한군의 작전권을 중공군에 넘겨주었다.

 
리지웨이(왼쪽) 미8군 사령관이 1951년 1월 4일 한강부교 설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국방일보 DB]

리지웨이(왼쪽) 미8군 사령관이 1951년 1월 4일 한강부교 설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국방일보 DB]


1951년 1월 1일 새벽, 서울을 향한 중공군의 전면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은 13병단의 4개 군단을 주공, 2개 군단을 예비대로 해 문산·연천·철원으로부터 의정부-서울을 향해 쇄도했다. 철수를 계속하면서 사기가 떨어진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38선(방어선 B)을 내주고 수도권 방어선(방어선 C)으로 철수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철수 명령을 내렸다.

시민들은 피난을 준비했고 일부는 이미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은 20일 국회 개회식에 참석, “정부는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며 나는 여기서 죽기로 각오했다. 조국이 위기에 있을 때 혼자 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모두 죽을 각오로 함께 싸우자”고 연설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1월 2일 대통령은 8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원주작전지역을 다녀왔다. 1월 3일,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위한 공세가 강화됐다. 서울 북쪽에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적 포병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 아래 수도권 방어선 C를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은 사전에 무초 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작전상 후퇴’한다는 계획을 통보했다. 그리고 서울 남방 60㎞ 지점인 방어선 ‘D’(평택-삼척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4 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무초 대사와 조병욱 내무장관이 서울을 떠날 것을 강력히 건의해 이승만 대통령은 3일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1월 4일 마지막 후위 부대인 영국군 29여단이 한강 가교를 통과한 뒤 가교는 다시 폭파됐다. 중공군은 5일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 한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피난민들은 그 위를 걸어 한강을 넘었다. 일부는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인구 150만 명 중 80%가 떠나 서울은 유령 도시가 됐다. 서울을 떠난 이들뿐만 아니라 북에서 월남한 사람까지 내려와 삼남지방은 초만원을 이뤘다.

중공군의 개입은 침략자를 도와준 불법개입이라는 점과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비인도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근대화된 무기 없이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중공군은 먼저 징과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며 요란스럽게 접근해 대항군이 공포심을 느끼고 도망가도록 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법을 변형해 적에게 두려움을 주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이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쓴 데는 군사적 목적 외에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정치범이나 기타 죄인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인간 청소의 수단이다. 중공정부 탄생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사상을 비판하거나,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방해가 되는 전통적 보수 우익 관료들을 체포해 전쟁터로 보내 자연스럽게 죽게 한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지방부호와 엘리트, 특히 마오(毛)의 공산주의 폭력혁명에 협조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들이 총알받이로 전선에 내보내졌다. 이들을 다 죽여야 노동자와 빈농이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중공군은 300만 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상당수 숙청 대상자가 포함됐다. 공산권 자료는 엄격한 비밀주의를 유지하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20만 명에서 1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배영복 전 육군 정훈감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61201&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1155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