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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34. 당신에게 이름을 묻다

“여기서 뭐해요?”
 
아트가 어린 소년 같이 맑은 웃음을 웃으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날씨가 몹시 추운데도 수트 위에 블랙 싱글 코트 하나를 걸쳐 입은 채였다.
 
큰 키 때문에 무릎 위에서 덜렁 잘려나간 블랙코트는 그리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무심한 듯 보이는 웃음은 언제나 따뜻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웃음은 그리 진지하지도 않고 맑기만 한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웃음과 만날 때면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아주 간절히 불렀는데... 아세요?”
 
“그럼요... 알죠...”
 
아트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트는 늘 그랬다.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가끔 그 웃음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내 눈동자 저 편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잘 돌아오셨고... 일은 잘 흘러가고 있나요?”
 
천천히 내 걸음에 보조를 맞춰 걸으며 아트가 물었다.
아트는 내가 왜 파리에 갔으며 왜 그렇게 급하게 돌아왔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파리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헤어진 뒤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그는 마치 나와 함께 했던 것처럼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잘 돌아왔지만 잘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실제 그랬다. 태블릿을 가지고 잘 돌아오긴 했지만 그건 가지고 오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님 새로이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방금 들었던 장현수의 음성을 떠올리니 머리가 다시 얼얼해 지는 것 같았다.
 
“자신만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들 상처는 몰랐다고 했잖아요.”
 
아트는 국회의사당 정원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아....”
 
그는 파리 카페에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 거였다.
 
“그게... 잘 안되네요...”
 
“처음 마음 먹은 대로 그렇게 하면 되죠...”
 
아트는 여전히 의사당 정원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었다.
 
정원엔 이미 겨울이 들어서 있었다. 지난여름, 초록 빛 물이 씌워진 듯 그리 파랗던 잔디는 어느새 완전한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처음 가졌던 생각이 뭐였을까...? 난 사실... 우리가 파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기 전까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트와 같은 곳으로 내 시선을 겹쳐 놓았다. 잔디를 둘러싼 나무들은 잎을 떨궈버린 채 휑하니 바람 속에 놓여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생각하면 되죠...”
 
그렇지 않아요? 아트는 자신의 말에 동의라도 구하겠다는 듯 멀리 던져놓았던 시선을 끌어와 내 얼굴을 향했다.
겨울 햇살에 잠시 반짝 빛을 내던 그의 동공은 마치 블랙홀처럼 뻥 뚫려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 그 상대의 마음보다 내가 상처받지 않을 생각부터 했던 나는 정말 이기적이었단 생각이 들어요. ”
 
“그게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거죠?”
 
내가 아트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가? 깜짝 놀라 아트를 쳐다보았다.
 
“변명 같지만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죠... 한 사람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 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아버지에게 자신을 다 던지는 엄마를 보면서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고.... ”
 
그는 내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요.. 변명 같지만 그래서.. 난 나 자신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까... 달라지겠죠...”
 
“그런데 그게... 내가 마음을 다 털어놓는다면.. 모르고 있던 상처를 일깨워 더 아프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나 혼자 멈추면 되는 일인데... ”
 
아트는 천천히 걸으며 무심히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에 코가 빨개져 있었다.
그는 내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치유는 없는 거네요.”
 
“누구의...?”
 
“모두요...”
 
갑자기 전날 쥬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나머지 여섯 명인가? 아니 장현수는 없으니.... 다섯이군. 근데 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다 이야기 한 건가? 다른 사람들한텐 이런 식으론 하지 말지...’
 
쥬디의 이 말 때문에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었다. 나는 나 자신 외에 다른 누구의 상처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쥬디는 그것조차 의심했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지 않냐고.
 
그건 멍청함이나 어리석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어릴 적부터 보아온 내 엄마와 아버지의 문제였으며, 곧 그것이 내 문제였다.
 
‘알고 저지른 것과 모르고 저지른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알고 있니?’
 
쥬디의 물음에 내가 답했었다.
 
‘알고 저지른 게 더 나쁘지. 악의적으로 보이니까...’
 
‘아니야. 모르고 저지른 게 훨씬 더 나빠. 왜냐면... 모르고 저지른 것들은 계속 반복되는 법이거든. ’
 
쥬디의 말이 칼처럼 날아와 내 가슴을 명중했다. 
파리에서 아트와 대화하면서 내 생각에 변화가 생긴 건 분명했다. 나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했다면 마음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또 다른 상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어머니가 힘 드셨나요?”
 
“그래요... 아빠는 엄마의 사랑을 거절했어요. 엄마는 자신의 전부를 다 내놓은 건데....”
 
“그 이유가 뭐였어요?”
 
코 뿐만이 아니라 아트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아빠한텐 다른 여자가 있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아내의 사랑을 내팽개치는 사람이 내 아빠라는 사실에 절망한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어쩌면 세상의 모든 남자를 믿지 않게 된 건지도...”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건가요?”
 
아트가 목까지 코트 깃을 세우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설마 딸한테 아빠가 그걸 털어놓으실까요?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런 아빠를 지켜봤어요.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 가는 아빠가 싫어서 재롱을 피우면서까지 붙잡아봤지만 실패했던 것 같아요.”
 
아트의 빨개진 얼굴을 보니 퍼 코트에 퍼 머플러로 몸을 누에고치처럼 감싸고 있는 내가 미안했다. 머플러라도 하나 풀어서 줘야하나 갈등되었다.
 
“그래도 아버지 진실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난 오해라곤 생각 안 해요. 아빠랑 30년도 넘게 살았어요... ”
 
“30년을 넘게 같이 산 아버진데... 미워하더라도 진실을 알고 미워해야죠...”
 
아트의 얼굴과 코는 이미 빨갛게 얼어있었다. 아트의 걸음이 빨라졌다. 내가 머플러를 건네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정문 쪽으로 나가면 바로 길 건너에 유명한 전통 찻집이 있었다. 너무 천천히 걷느라 나도 손과 발이 시려왔다.
 
“저기요... ”
 
앞 서 걷는 아트를 불러 세우려고 보니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저기... 이름이 뭐예요? 전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어요..”
 
아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내 질문에 답하려는 건가 했더니 김천수가 의원회관에서 우리 쪽으로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어? 김천수씨네. 오전에 잠깐 만났었는데... 아까 전화번호라도 알아내려고 도서관에서... ”
 
내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바로 옆을 걸어가던 아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천수 쪽으로 뛰어갔나 싶어봤지만 김천수는 내 쪽으로 오다 다른 일행과 만나 후생관 쪽으로 방향을 튼 후 였다.
 
여전히 아트는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길에서 혼자가 되었다. 아트는 오늘도 이름 전화번호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누나!”
 
모르는 번호에서 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오랜만이야...”
 
지난 8월 만난 후 썬의 전화를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었다.
 
“누나가 내 번호로 전화를 안 받아서... 친구 전화로 한 거야.. 지금 잠깐 만났으면 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긴장된 목소리였다.
 
 
약속한 곳은 썬의 오피스텔 로비였다. 약속보다 이른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썬은 이미 와 있었다. 라쿤 털이 넘실거리는 카키색 구스다운을 입고 찬바람을 맞으며 오피스텔 입구에 서 있었다.
 
“집으로 바로 올라갈래? 그냥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하면 누나가 싫다고 할 것 같아서.... 이야기 하려면 조용한 곳이 나을 거 같은데...”
 
근 4개월 만이었다. 라쿤 털이 넘실거리는 카키색 구스다운을 입은 썬이 어느새 내 손을 잡아 엘리베이터로 가고 있었다.
 
썬의 집은 여전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깔끔하고 깨끗한 집이었다.
 
“누나, 아팠던 날 여기 오고 처음인거... 알지?”
 
커다란 머그잔에 따뜻한 커피를 따라주며 썬이 말했다.
 
“이야기 해.. 4개월 동안 다른 번호로 전화 못해서 안한 건 아닐 거잖아. ”
 
“누나한테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금 고민했었어.”
 
유쾌하고 밝은 언제나 명쾌한 썬이 이렇게 머뭇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오늘 점심 먹으러 학교 정문을 나오는데... 누가 나를 잡더라고.. 내 이름을 대면서... 맞다고 했더니 정문 앞에 세워놓은 차에 잠깐 타자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차에 탔는데... 거기서 누나가 나오는 어떤 영상을 보여주더라고... ”
 
“영상...?”
 
“응... 누나가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랑 밥 먹고 술 마시고 뭐 그런 거였어. 그 이상은 더 없었고... 몰카로 촬영한 것 같은데... 나한테 왜 이걸 보여 주냐고 물었더니 거기 나오는 사람이 반미주 맞는지 확인해보는 거라고... 5분쯤 보다가 모르겠다고 그냥 나왔어. ”
 
눈앞이 캄캄해 왔다. 썬에게 이걸 보여준 건 한정현이 보내는 협박의 신호탄이기도 했지만 내 주면의 모든 사람의 신상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너를 거기로 데려간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
 
“많아도 내 또래? 어린 친구들이었어. 검은 양복을 좍 빼입었던데... 조폭은 아니고.. 만일 조폭으로 보였으면 내가 따라가질 않았지.... 두 명이었는데 예의바른 사무원처럼 굴던 걸...”
 
국회 앞에 세워놓은 차를 타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한정현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맛보기로 보여준 건지도 몰랐다.
 
“미안해..”
 
“아니야 그런 말 들으려고 누나한테 연락 한 건 아니고...”
 
“우선 그런 사람들이 너한테 접근하게 해서 미안하고... 또 하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들... 만나고 있었어. 너랑 만나는 중에도 계속... 이건 정말 많이 미안한 부분이야. 용서받고 싶어....”
 
“잠깐.. 오늘 나한테 접근한 사람들이 누군지 누나는 알아?”
 
“누가 시켰는지는 알아...”
 
“의도가 뭐지? 그 의원이라는 사람이랑 누나가 비밀스러운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던데.. 그걸 나한테 왜 보여준 거지.”
 
썬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난 누나가 내 전화나 문자 다 차단하는 거 같아서... 결혼 준비하는 줄 알았어. 그래도 조금 섭섭하긴 했지. 우리... 떠날 땐... 떠난다고 서로 미리 말해주기로 약속했었는데... 그래서 사실 처음엔 많이 서운하고 조금 밉기도 했는데.. 기다리기로 했지... 누나는 그렇게 훌쩍 떠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나를 위로하면서...”
 
“결혼은 무슨.... 아무튼 미안해... 복잡한 많은 일들이 있어서.. 하지만 설명할 수가 없어.. 네가 이해해줘...”
 
썬은 그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낮의 일로 긴장이 덜 풀렸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오늘 일어난 그 일은 순전히 나 자신하고만 관계있는 일이야. 너는 전혀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정말 미안한 건... 너 만나면서 다른 사람들 만났어.. 너 말고도 깊은 관계였던 사람 있어... 그게 미안해...진심으로.. ”
 
사실 다른 누구보다 썬에게 가장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썬은 나보다 나이가 많이 어렸고 내 후배였고... 그리고 썬 역시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해할게.. 누나가 그랬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어.....”
 
“어렵게 누나가 이야기하는 거니까... 존중할게. 진심으로... 누나니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그렇게 안 밝혀도 되는 건데... 이야기 안하면 모를 일인데... ”
 
“내가 좀 바보 같아서 나만 생각하느라 그런 걸로 다른 사람들 생각을 못했어... 용서 빌고 싶어서 그래...”
 
“용서는 무슨. 내가 누나한테 말 하지 않았나? 나 일곱 살 때 우리 엄마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모성이나 그런 감정 잘 몰랐어. 그래서 그런지 누나 만나면서 많이 행복했어. 누나한테서 엄마 품을 많이 느꼈으니까.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
 
썬이 자기 어머니에 대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시작하는데 곧장 내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는 튜즈의 번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온 세상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처럼 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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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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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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