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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리포트] 다시 살아난 대자보, 취업·연애 고민까지 만방에 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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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고려대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들. 이 학교 학생이던 주현우씨가 써 붙여 화제가 된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에 답하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이화여대 학생들이 지난 7월 8일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붙은 대자보에 대한 답변을 적은 포스트잇들. [중앙포토]

가로 70㎝, 세로 1m인 하얀 종이가 2030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대학 안팎에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대자보가 붙는다. 최근 이화여대에 붙은 ‘어디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대표적이다.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씨의 딸 정유라(20)씨에 대한 특혜 의혹을 겨냥해 “나, 어제도 밤샜다”로 시작한 이 대자보는 “학점은 낮아도 너보다 당당하다” “내 벗들과 맞설 수 있어 기쁘고 자랑스럽다” 등의 표현으로 공감을 샀다. 지난달 고(故) 백남기(69)씨의 ‘사인(死因)’을 둘러싼 논란이 일자 서울대병원 전공의들도 대자보를 붙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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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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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소통’을 결합하면 자연스레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2030세대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대자보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뭘까. 중앙일보 청춘리포트팀은 지난 20일 “대자보를 써보고 싶다”는 청년 4명을 서울 광화문의 한 스터디룸에 불러 대자보의 매력에 대해 듣고, 직접 쓰는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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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씨가 쓴 ‘여러분의 꿈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86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해 “매일같이 대자보에 들어갈 내용을 써 글씨 잘 쓰는 친구에게 넘겨주곤 했다”는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이들의 생각에 의견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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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대자보에 어울릴 글자 크기를 가늠하던 네 명에게 대자보의 힘이 뭔지 물었다. 김정희씨는 ‘불편함’을 말했다. 그는 “SNS는 편하다. 편하니까 가벼워 보인다. 대자보는 일단 종이를 사야 하고, 안 쓰던 매직을 찾아내서 내 손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가야 하니 진지한 얘기라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이택광 교수는 “SNS를 하더라도 진심 어린 얘기는 손으로 쓴 뒤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경우가 많지 않나. ‘이만큼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대자보를 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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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씨가 쓴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대자보.

대자보는 1980년대 대학가에 처음 등장했다. 언론자유가 통제되던 상황에서 민주화의 열망을 대자보를 통해 쏟아냈다. 그만큼 투쟁적이었다. “좌시하지 않겠다” “강철 대오” 등 강렬한 표현이 대자보를 채웠다.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이 쇠퇴하며 자연스레 대자보의 효용성도 줄어들었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90년대 말. 이택광 교수는 “때마침 디지털이라는 대안 공간이 생겼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아고라’ 같은 토론장이 생기며 대자보의 역할이 죽었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들어 서울대와 한국외대, 전북대 등은 ‘클린 캠퍼스’ 정책을 펼치며 손으로 쓴 대자보와 현수막, 벽보 등을 정비했다. 일부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며 반발했지만 이후 “대자보는 운동권 학생들이나 쓰는 것”이란 인식이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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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윤

대자보가 다시 눈길을 잡아챈 건 언제부터일까. 이택광 교수는 “대자보가 요즘 청년들에게 깊이 각인된 건 2013년 고려대에 붙은 ‘안녕들 하십니까’부터다. 이 대자보가 시선을 끌면서 ‘저렇게 쓰면 들어준다’는 자신감이 붙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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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윤씨가 쓴 ‘남자친구 없느냐고 묻지 마세요’.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 학내에 써 붙인 ‘안녕들 하십니까’는 당시 이 물음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하 수상한 시절에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로 시작하는 이 글은 당시 사회 전반의 이슈를 거론하며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라며 청춘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이정윤씨는 “당시 ‘내 앞길이 벅차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부채 의식이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그런 마음에 자극을 주면서도 공격적이지 않은 감성적인 표현들이 독특했다”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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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안녕들 하십니까’나 ‘어디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에게’에서 드러나듯 지금의 대자보는 80~90년대의 그것과는 글을 쓰는 주체나 표현 방식이 다르다. 이택광 교수는 “형태가 아날로그일 뿐 파편화된 개인들이 SNS에 글 쓰듯 대자보를 써 붙이는, 사실상 1인 매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며 “과거보다 내용이 다양한 것도 이 때문”라고 덧붙였다. 실제 요즘 대자보는 주제가 천차만별이다. 지난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묻지마 범행’으로 사망했을 때는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서 우리 모두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살아남았다” 대자보가 각 캠퍼스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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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씨의 ‘여성혐오와 차별’을 지적한 대자보.

청춘리포트팀과 대자보를 쓴 네 명도 개인적인 고민을 써 내려갔다. 이정윤씨의 대자보 제목은 ‘남자친구 없느냐고 묻지 마세요’. 이씨는 “지난 명절에 ‘참 좋은 나이인데 왜 남자친구가 없느냐’는 말을 다섯 번 이상 듣고 이것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조금씩만 타인의 사생활을 존중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3분의 2쯤 채운 상황에서 “글자 크기를 잘못 잡았다”며 울상 짓던 김형식씨는 ‘여러분의 꿈, 안녕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다. 그는 “뮤지컬 배우가 꿈이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꿈을 좇지 못하는 나의 고민을 같은 세대와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희씨는 “여행마저도 자기소개서에 쓸 만한 지역을 택해서 떠나는 팍팍한 대학생활에 한숨이 난다”는 내용을 하얀 전지에 꾹꾹 눌러썼다. 수년 전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동진씨는 ‘다른 성(性)에 대한 혐오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쓰던 손을 멈추길 수차례. 네 사람 모두 대자보를 완성한 것은 시작하고 두 시간여가 지나서였다. 넷 다 “학교에 붙어 있던 대자보의 글씨가 왜 그렇게 오르내리고 삐뚤삐뚤한지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김정희씨는 “글을 쓰는 내 감정이 고스란히 글자로 옮겨지더라. 격앙될 때는 글자도 커졌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듣던 이정윤씨는 “감정이 담겨 있어서인지 정돈되진 않았지만 자필 대자보가 더 힘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많은 유행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빠르게 잊힌다. 대자보의 힘은 얼마나 오래갈까. 이택광 교수의 대답은 이랬다.

“대자보는 이미 하나의 정례화된 표현 방식이 됐다. ‘안녕들 하십니까’이후 ‘살아남았다’나 ‘국정교과서 반대 대자보’ 등이 꾸준히 입길에 오르내린 것만 봐도 그렇다. 청년들에겐 대자보가 개인의 내밀한 목소리를 진지하게 표출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김나한 기자 kim.na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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