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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동면 준비하는 세종 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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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근
경제부 차장

“여당이 과반일 때도 법 하나 통과시키기 어려웠다. 하물며 여소야대에선 말해 뭘 하나. 괜히 나섰다간 혹만 붙이지….”

경제부처 한 관료가 털어놓는 ‘복지부동의 변(辨)’이다. 여의도 상황을 보아 하니 어차피 추가 득점은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수비로 전환해 실점을 안 하는 게 상책이란 얘기다. 관료만큼 정치 풍향계에 예민한 집단도 없다. 5년마다 찾아오는 계절풍은 어김없이 세종 관가에 불어닥치고 있다. 노련한 관료들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동면(冬眠)을 준비할 때가 됐다는 신호다. 타이밍을 재기 위해 굳이 촉수를 세울 필요도 없었다. 집권 여당이 의사일정을 보이콧하고, 그 대표가 단식농성에 나서는 것만큼 확실한 ‘사인’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복지부동에도 급(級)이 있다. 대놓고 일손을 놓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다. 활발히 움직이는 듯 보이면서도 위험이 따르는 결정은 교묘히 피해 가는 게 실력이다. 장관들이 현장을 분주히 돌아다닌다고, 각종 ‘대책’과 ‘방안’이 쏟아진다고 실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업시간에 교사의 눈을 피해 교묘히 졸던 고수들을 연상해 보라. 여기에 그럴듯한 명분이 갖춰지면 금상첨화다. 관가에 갑자기 재정 보수주의자, 시장주의자가 늘어나는 것도 이즈음이면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이다. 무엇보다 재정 건전성이 중요하니 가급적 일을 벌여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기간산업의 구조조정 같은 일도 시장이 알아서 하는 것이란 원칙이 새삼스레 강조된다.

특정 부처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하는 척만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역설적인 판별법이 있다. 부처 앞을 날마다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다면 ‘일 좀 하네’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정책의 핵심은 자원 배분의 조정이다. 자연히 기득권을 건드릴 수밖에 없고, 마찰과 저항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요즘 세종에선 좀처럼 대규모 시위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도 너무한다 싶었을까. 국회 예산정책처는 내년도 세법개정안을 분석하면서 “주목할 만한 게 없다”는 이례적인 평가를 내놨다. 세제는 핵심적인 정책 수단이다. 하지만 엘리트 관료들이 밤을 새우며 만들었다는 세법개정안에서 도무지 뭘 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영혼 없는 관료’를 탓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관료의 복지부동은 5년 단임의 ‘87년 체제’ 이후 반복됐고, 꾸준한 학습효과를 통해 공고화했다.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를 놔둔 채 특정 집단에 희생과 사명감을 요구하는 건 그리 좋은 해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 찜찜한 건 늘 큰 위기가 이 공백기를 틈타 찾아왔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신용카드 사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랬다. 세종 ‘정책 생산단지’의 태업이 두려운 것도 그래서다.

조민근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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