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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3 - 예수가 고친 건 ‘오그라든 손’일까, 아니면 ‘오그라든 마음’일까

독사의 눈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해치울 수 있을까?’ 그렇게 노려보는 눈들이 회당 곳곳에 박혀 있었다. 예수는 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마치 호랑이 굴로 들어서듯이 말이다. 회당 안에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예수의 눈에도 그 사람이 들어왔을 터이다. 유대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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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 작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 안나’. 아기 예수가 사탄을 상징하는 뱀을 밟고 있다.


그건 ‘덫’이었다. 유대 율법사회에서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예수는 그 덫을 밟았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복음 12장11~12절)

맹자도 비슷하게 묻는다. 어린 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면 어떡하겠는가? 그냥 놔두면 아이는 십중팔구 우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기어가는 아이를 구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천성은 선(善)하다. 인간의 성품은 하늘을 닮았으니 하늘의 성품이 본래 선(善)하다. 그게 맹자가 좇는 ‘하늘의 성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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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안고 있다. 예수는 울타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서라도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라고 했다.

예수는 회당 안에 들어섰다. 그는 인도주의나 박애주의를 표방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창한 철학이나 사상을 내걸지 않았다. 대신 예수는 하늘의 속성을 보여주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날’이었다. 예수의 안식일은 달랐다. 예수에게 안식일은 자신이 쉬고, 이웃이 쉬고, 세상이 쉬고, 우주가 쉬는 날이었다.

예수 앞에 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양이 구덩이에 빠져 있다. 양의 목숨이 위태롭다. 안식일이지만 양은 쉴 수가 없다. 그걸 보는 예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도 쉴 수가 없다. 그런 양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떨까. 세상 역시 쉴 수가 없다. 그럼 그 모두를 품고 있는 우주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내가 쉬지 못할 때는 우주도 쉬지 못한다. 내가 쉬어질 때 비로소 우주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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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고 있다. 예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펴졌다고 한다.


이제 이유가 보인다. 예수가 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쳤는지 말이다. 예수야말로 ‘안식일’을 지켰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껍데기를 지킬 때 예수는 홀로 안식일의 알맹이를 지켰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눈에는 이 모든 우주가 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식일을 지킨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였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쉼’이란 뭘까. 휴가를 받아서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는 일일까. 아니면 도심의 극장에서 만사를 잊고 영화를 한 편 감상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별이 쏟아지는 캠핑장에서 바비큐를 하며 자연을 즐기는 일일까. 이 모든 순간에 ‘쉼’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이 모든 순간에 ‘쉼’이 없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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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의 회당 유적지. 이곳은 베드로의 장모가 살던 마을이다.

가령 밤 별이 울어대는 강원도 산골에서 월요일에 회사에 제출해야 할 보고서 걱정만 하고 있다면 어떨까. 거기에는 ‘안식’이 없다. 몸은 강원도에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안식은 마음도 포맷이 될 때다. 그렇다면 예수가 회당에서 고친 것이 오그라든 손뿐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가 회당에서 하늘의 속성을 전하며 진정으로 고쳤던 것은 사람들의 ‘오그라든 마음’이었다.

‘오그라든 손’ 대신 ‘오그라든 마음’을 성경에 대입하면 어떨까. 그럼 멀찌감치 서 있던 예수의 이적 일화가 성큼성큼 걸어와 나의 이야기가 된다.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예수가 말했다. ”손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hand)“. 성경에는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마태복음 12장13절)고 기록돼 있다. 나는 회당의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회당의 입구, 그늘진 자리에 내가 앉아 있다. ‘오그라든 마음’을 가진 내가 앉아 있다. 그때 회당 안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나는 예수를 쳐다보고, 예수는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친다. 예수가 내게 말한다.
네 마음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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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온갖 희로애락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꾸깃꾸깃하다. 마음의 도화지에는 곳곳에 구김살이 파져 있다.

우리의 마음은 꾸깃꾸깃하다. 수시로 구겨진다. 감당해야 하는 온갖 세상사로 인해 마음의 도화지는 구겨진 종이뭉치가 된지 오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구겨진 마음만큼 우리의 삶도 뻣뻣해진다. 그래서 ‘안식’이 없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향해 말했다. ”네 마음을 뻗어라.“ 구부러진 것을 펴고, 오그라든 것을 펴고, 접힌 것을 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본래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그걸 위해 예수는 다림질을 한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크테이노(ekteino)’라는 단어를 썼다. 구겨진 것을 ‘펴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가 설한 산상수훈의 메시지와 팔복, 주님의기도는 모두 다림질이다. 오그라든 우리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다시 펴게 하는 예수의 다림질이다. 성경에는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성해지다’는 영어로 ‘restore’다. ‘회복하다’는 뜻이다. ‘곡(曲ㆍ굽을 곡)’을 ‘직(直ㆍ곧을 직)’으로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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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작 ‘병자들을 고치는 예수’. 예수는 몸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고쳤다.

삶의 이치,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에 대한 곡해. 그로 인해 구김살이 생긴다. 구김살이 심해지면 우리의 손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오그라든다. 결국 우리에게서 ‘안식’이 없어진다. 그래서 곡해를 직해로 바꾸어야 한다. 그럴 때 곡(曲)이 직(直)이 된다. 굽은 손이 펴지고, 굽은 마음이 펴진다. 그럼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율법을 깨는 파격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안식, 그 자체였다. 이 일화를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안식이란 무엇인가?’ 그걸 되묻는다.

가버나움의 회당 유적지를 나왔다. 바로 곁에 있는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2000년 전에는 호수 주변에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병자도 많고 장애인도 많았을 터이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마귀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수가 그런 사람을 고쳐주자 유대인들은 질겁했다. 마귀를 이겼으니 더 큰 마귀의 힘을 쓴 게 아니냐.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따졌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마태복음 12장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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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가나안 지역의 사람들이 믿던 신 바알. 셈족어로 ‘주(主)’를 뜻하며, 히브리어로는 ‘하늘의 주인’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에게 바알은 이방신의 상징이었다.

베엘제불(바알제불)은 고대 셈족의 신이었던 ‘바알’을 가리킨다. 셈족어로 ‘주(主)’를 뜻한다. 히브리어로는 ‘하늘의 주인’이다. 구약에서 바알과 야훼는 끊임없이 경쟁한다. 유일신을 믿던 유대인들도 신앙이 약해질 때마다 수시로 다신교의 신 바알을 섬겼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바알이 ‘이방인의 신’ 혹은 ‘악마’와 동일시된다. ‘바알’은 농경사회였던 가나안에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남성신이었다. 야훼와 바알의 대립을 목축문화권과 농경문화권의 충돌로 보기도 한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바알’을 사탄의 우두머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바알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다며 예수를 공격했다.

예수는 받아쳤다. ”사탄이 사탄을 몰아내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겠느냐? 그럼 너희의 제자는 누구의 힘을 빌려 사탄을 몰아내느냐?“ 그런 예수의 반박에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반박이 이치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12장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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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신은 종종 황소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예수의 선언은 파격적이다. “당신이 지금 사탄의 힘을 빌리고 있지 않느냐?”며 공격하는 이들에게 ”너희에게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다”고 공표했다.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내 눈 앞에 와 있는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말이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를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예수는 그 이유까지 설명한다. 사람들이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모두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용서받지 못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성령에 대한 모독’이다. 성령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게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해석은 너무 1차원적이다. 그게 아니다. ‘모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블라스페미아(blasphemia)’이다. 무언가를 ‘해치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은 ‘성령을 해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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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의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작 ‘삼위일체’. 삼위일체를 주제로 한 그림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가운데가 성부, 왼쪽이 성자, 오른쪽이 성령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다. 속성이 통한다. 셋이 하나다. 그래서 삼위일체다. 모두 하느님의 위격이다.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다. 개신교가 국내에 전래되던 초기에는 성령을 ‘숨님’이라 불렀다. 신이 인간을 지을 때 불어넣은 숨이다. 그럼 성령을 해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렇다. 신의 속성을 해치는 거다. 신의 속성에서 어긋나는 걸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왜 ‘신의 속성에서 어긋나는 일’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을까. 우리가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해놓고선 말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신의 속성’이 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짓는 죄와 신에 대한 불경은 모두 그 밭에서 자라는 오이나 가지, 토마토 정도에 불과하다. 가령 오이나 가지가 썩었다고 하자. 그럼 잘라서 버리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밭에서 다시 오이와 가지가 올라온다. 그런데 밭 자체가 망가지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씨앗을 심어도 싹이 트지 않는다. 어떠한 농작물도 올라올 수가 없다. 바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이와 가지, 토마토를 망치는 일은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밭을 해치는 일은 결코 회복될 수가 없다. 그게 이치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을 해치는 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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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작 ‘거룩한 삼위일체’. 왼쪽에 서 있는 여성이 막달라 마리아, 오른쪽이 세례 요한이다.

예수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장32절) 무슨 뜻일까. 농사법이 잘못됐으면 고치면 된다. 그런데 밭이 망가지면 방도가 없다.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다. 예수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왜 그럴까. 그건 시공간을 초월해서 통하는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안의 밭, 그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 중요하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진리의 원천은 성경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이자 농민전쟁을 이끈 좌파 혁명가였던 토마스 뮌처(1489~1525)는 루터보다 더 깊은 곳으로 두레박을 던졌다. 그리고 통찰의 눈을 길어올렸다. 뮌처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 원천은 성령에서 나온다.“ 뮌처는 한때 수도원에 머물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 기록됐으니 우리가 닿을 곳은 ‘성령’이라고 했다. 뮌처는 진정한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부여한 ‘내면의 빛’이라고 보았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의인론(義認論)을 반박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로 인해 뮌처는 나중에 루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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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성당의 천장 그림.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은 종종 비둘기로 표현된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성경 구절 때문이다.

이스라엘 회당에서 예수를 공격했던 유대인들도 진리의 원천을 성경으로 보았다. 성경 속에 담긴 가르침. 그들에게는 그 가르침이 율법이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행동의 절대 지침이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것만 보였다. 그래서 그걸 가장 중시했다.

예수의 눈은 달랐다. ”무엇을 위한 율법인가?“를 따졌다. 뮌처가 ”무엇을 위한 성경인가?“를 따지듯이 말이다. 율법은 도구일 뿐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방편이다. 그럼 성경을 통해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게 뭘까. 다름 아닌 성령이다. 영어로는 ‘holy spirit’이다. 하늘 위를 떠돌다가 번개처럼 내 머리에 꽂히는 초자연적 로또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게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잇는 속성이다. 둘을 하나로 잇는 속성이다.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그 속성의 작용이 성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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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미술의 거장이었던 휘 베르트와 얀 반 에이크 형제 작 ‘비둘기 형상의 성령’. 천사들이 ‘하느님의 어린양(예수 그리스도)’을 경배하고 있다.

성령이 임할 때는 어김없이 ‘에고’가 무너진다. 나의 고집이 무너지고, 나의 신념이 무너지고, 나의 패배가 드러난다. 그렇게 ‘신의 속성’도 드러난다. 사람들은 나의 에고가 무너지면 폐허만 남으리라 여긴다. 그런 폐허 속에서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예수의 메시지도 이와 맥이 통한다. 왜 그럴까. 에고가 무너질 때 비로소 통로가 생기기 때문이다. 성령을 만나는 통로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은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28~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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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고 했다. 거기에 담긴 예수의 눈, 예수의 이치를 배우라고 했다.

소가 밭을 갈 때 어깨에 씌우는 것이 멍에다. 소는 멍에를 짊어져야 밭을 갈 수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밭도 그렇다. 나의 고집과 잣대로 딱딱해진 밭은 쟁기를 들이대도 쉽게 갈리지 않는다. 그걸 갈아 엎으려면 멍에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 멍에나 멘다고 마음의 밭이 갈리는 건 아니다. 딱딱하고 자갈 투성이인 내 마음을 파고들려면 ‘이치의 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했다. 예수의 멍에가 뭘까. 예수의 가르침이다. 거기에는 예수의 눈, 예수의 이치가 녹아 있다. 그 이치가 우리의 밭을 파고든다. 그래서 밭이 갈린다.

멍에는 무거운 도구다. 짊어지기만 해도 어깨를 옥죈다. 예수의 설명은 정반대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멍에가 우리의 멍에를 부수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우리의 고집, 우리의 착각, 우리의 이념이다. 그게 부서진 자리가 바로 안식(安息)의 자리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31~32절) 진리(眞理)가 뭔가. 참된 이치다. 그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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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위로 하늘의 노을이 떨어졌다. 저 멀리 헤르몬 산이 보인다.

갈릴리 호수의 서편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도 물들고 호수도 물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을까.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떡해야 자유로운 삶이 가능합니까?“ 그 모든 물음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치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다음주는 연재를 쉽니다. 34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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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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