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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달라는 아내에게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 .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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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씨는 요즘 집에 가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남편을 마주할 때면 괜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뭔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더 이상 그가 편하지 않다. 여전히 남편은 따뜻하고 희주씨를 많이 배려한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 전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희주씨를 크게 흔들었다.

“나도 많이 참고 애쓰는 게 있지. 당신에게 맞추려고.”

희주씨는 바로 쏘아붙였다. “뭘 그렇게 애를 쓰는데? 그래서 많이 힘들다는 거야?” 남편은 당황하며 얼른 말을 돌렸다. “아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다 좋아 당신. 모든 것이 좋아.” 남편의 수습에 더 이상 말을 잇진 못했지만 그날부터 희주씨의 마음엔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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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씨는 늘 믿어왔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고 그 이유는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좋은 점 때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 오랜 연애 기간을 거친 건 아니지만 내게는 부끄러웠던 여러 단점에 대해 남편이 ‘그것이 뭐가 문제냐’고 할 때 제대로 된 운명의 짝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부터 희주씨는 소망했다. 내가 변해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지금의 이 모습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남편을 만나고 그 소망을 이뤘다고 생각해 희주씨는 비로소 안심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제 더 이상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억지로 애쓸 필요는 없어.

사실 희주씨는 늘 불안했고 노력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 어머니는 항상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만큼이나 희주씨 역시 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어머니는 희주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주 한숨을 내쉬곤 했다. “엄마 너무 힘들다. 네가 도와줘야지.” 그 말을 들을 때면 희주씨의 몸은 얼어붙었다. 혹시 내가 더 잘못하면 엄마마저 떠날지 몰라.

희주씨는 자기 욕구를 억제하고 늘 엄마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 했다. 그럴수록 희주씨의 마음엔 갈증이 느껴졌다.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화나면 화도 내고, 짜증이 나면 내뱉고 싶어. 하지만 그런 행동을 희주씨의 어머니는 받아주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이 답답했지만 집에서는 그 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대신 남자친구를 사귈 때면 성질을 부리곤 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그것이 탈출구였다. 고집을 부리고,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고. 그래서 연애는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달랐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지난달 던져진 남편의 말. 그 말에 희주씨의 믿음은 뿌리째 흔들렸다.

결혼 전과 달라진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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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혈투』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올해의 발견작가’상을 수상한 프랑스 신예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 한 커플의 일상을 따라가며 사랑의 기쁨과 슬픔, 기대와 반목, 희망과 좌절을 절묘한 스케치로 표현했다. 원제는 도살(la Boucherie). 그만큼 사랑의 변화무쌍하고 짠한 아픔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미메시스. 9800원.

희주씨가 바란 것은 무엇일까?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하기에 나를 싫어할 수 없다. 내가 굳이 조심하지 않아도, 내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희주씨가 바란 사람은 실은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이다. 내 곁에 머물 사람. 그런 사람이 흔할 리 없다. 부모도 나를 떠날 수 있지 않나? 그런 사람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희주씨는 사랑을 하면서도 늘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 운명적인 사랑인지 확인해 왔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했다. 내 괴팍한 성질을 참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성질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나를 떠날 리 없다.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물론 남편은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희주씨만의 행복한 오해였을 뿐. 남편은 배려가 많은 사람이었고,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함께 좋은 것을 찾으려는 사람이었다. 희주씨가 성질을 부릴 때면 부담스러웠지만 다른 장점이 많다는 것이 희주씨에 대한 남편의 판단이었다. 성질을 부리는 것도 잠깐일 뿐이고 못 견딜 정도도 아니다. 게다가 자신이 그 순간을 잘 넘기면 희주씨는 더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희주씨에게 오히려 고마웠다.

의심하지도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운명적인 사랑은 좋은 것일까? 안정적인 것일까? 운명의 장부에 새겨져 있다면 분명 대단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런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운명의 장부가 아예 없다면 어떨까? 어떤 이유도 없이 우연히 만났지만 서로를 깊게 사랑하고 순간을 넘어 함께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운명이 아니니 가치가 없는 것일까? 운명의 도움도 없이 둘의 선택으로, 둘의 노력으로 그런 사랑을 이뤄낸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부모가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었으면, 내 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채워줬으면. 그것이 우리 유아기의 소망이었다. 소망은 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상처가 남아 이후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 때마다 다시 그 소망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 “내가 꼭 말로 해야 내 마음을 알아?” 하며 상대에게 서운함을 표현하고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 배신감을 느낀다. 이렇게 달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다른 존재가 만나서 하는 행위가 사랑인데 같은 존재여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랑을 밀어낸다.

사랑의 시작은 운명처럼 만나는 것일지 몰라도 사랑을 유지하는 데 운명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랑을 유지하는 힘은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견뎌내고 서로 다르기에 더 좋은 것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마음에서 온다.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단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려는 마음이고 다름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물론 함께하면서 서로의 단점이 누그러질 때 둘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희주씨가 해야 할 일은 의심이 아니다. 내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사람이 떠날 것이라고 불안해할 것이 아니다. 운 좋게도 희주씨는 불안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만났다. 이제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실은 희주씨의 부모도 떠날 마음은 없었다. 그저 희주씨의 상상이었을 뿐). 대신 진짜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을 받고 있나 걱정하지 말고 그저 사랑을 해야 한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하고, 나를 사랑하는 상대를 더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까지 희주씨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사랑을 영 모르는 사람은 아니니까.

 
서천석은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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