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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오바마 달래고 푸틴 품은 아베의 배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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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논설주간

성(姓)을 빼고 이름만 부르면 친밀한 관계에 돌입했다는 신호다. 지난달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회의 도중 아베는 갑자기 푸틴을 ‘블라디미르’라고 불렀고, 푸틴은 ‘신조’라고 화답했다. 두 사람은 정상회담만 벌써 14번 가졌다. 일본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대러 제재에 동참하면서도 절친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은 지난 세기 초 세계 최강의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대한제국을 집어삼켰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막판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일중립조약을 깨고 참전해 일본에 복수했다. 구원(舊怨)이 있는 두 강대국이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고립무원을 탈피하려는 푸틴, 평화조약을 맺고 북방 영토 교섭을 마무리지어 개헌을 해내려는 아베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러시아는 최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홋카이도까지 연결하자고 일본에 제안했다.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사이 타타르 해협 7㎞ 구간과 사할린~홋카이도 간 라페루즈 해협 42㎞를 다리나 터널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성사되면 섬나라 사람이 대륙의 설경(雪景)에 취해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을 누비는 파천황(破天荒)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아베는 이미 올해 5월 소치에서 푸틴과 만나 사업비 1조 엔(약 10조8000억원)을 넘는 8개 항의 경제협력 방안을 제시했고, 이를 전담할 장관직까지 만들었을 정도여서 제안은 진지하게 검토될 것이다.

 푸틴을 상대로 한 일본의 러브콜도 집요하다. 러·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것은 모리 요시로 전 총리다. 그는 2000년 총리가 된 뒤 첫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해 시베리아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참배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고, 당연히 푸틴이 동행했다. 모리의 부친은 2차대전 때 참전해 포로가 됐지만 일본으로 돌아가 일·소우호협회를 결성했고, 유해의 절반을 러시아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푸틴은 동방경제포럼에서 이런 스토리를 소개한 뒤 “우리의 과거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베의 의중을 전달하는 창구이기도 한 모리는 푸틴과 서로를 ‘요시’와 ‘볼로자’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사이다. 아베와 푸틴은 11월 페루에서 만난 뒤 12월 15일에는 아베의 정치적 고향인 야마구치현의 료콴(일본 전통 온천여관)에서 16번째 정상회담을 하고 평화조약을 향한 승부수를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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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스스로도 제재 중인 러시아를 고립에서 풀어 품겠다는 모순된 외교행위가 어떻게 가능할까. 국익을 지키기 위한 대담한 승부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직후인 2014년 3월 사이키 아키타카 외무성 사무차관을 미국에 보내 토니 블링컨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만나게 했다. 사이키는 크림반도 문제에는 미국과 공조하겠지만 러·일 관계 개선은 분리해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아베도 다음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러·일 관계의 진전이 동북아 안전보장 환경에도 득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건 미국·유럽·일본의 대러 제재 공조를 뒤흔드는 행보다. 하기야 소련에 접근해 중립조약을 맺은 뒤 8개월 만에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던 게 75년 전의 일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의 미국으로선 팽창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앞장서주는 일본과 갈라설 수는 없는 일이다. 아베의 배짱은 이렇게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략과 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밀월은 과거를 지배한 냉전의 주술(呪術)이 오늘의 평화까지 감금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최우선 순위 파트너로 러브콜을 받았던 한국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중국의 일대일로, 일본의 대륙연결과 결합하고 북극항로를 개발하면 침체된 세계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북한의 핵 도발이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단절구간(missing link)’이 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사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이고 창의적인 국제 공조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북핵의 근본적 해결에는 우리보다 미국이 더 적극적이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한 핵의 본토 공격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북·미 대화와 선제공격이라는 양극단의 해법을 동시에 꺼내들기 시작했다. 협상론자들은 당장 비핵화가 어렵다면 중간 단계로 핵 동결을 내걸고 진전에 따라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규모와 내용을 조정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제안까지 펼쳐놓고 있다.

 남들은 두 눈 부릅뜨고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는데 우리만 혼곤히 잠들어 있을 수는 없다. 위험천만한 핵 도박을 벌이는 북한에 대해 국제사회와 함께 강력한 제재와 압박을 가하되 평화의 해법도 준비할 때다. 늦기 전에 경제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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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