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박정호의 사람 풍경] “부추는 한민족의 나물 1호, 단군신화 마늘로 이어졌죠”

한반도 ‘식물 호적’ 만드는 김종원 계명대 교수
기사 이미지

김종원 교수의 집 마당은 작은 풀밭이다. 김 교수가 관상용으로 애용되는 자란(紫蘭)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일본인이 부르는 한자명 자란 대신 순우리말인 대밤풀을 쓰면 더 좋겠다”고 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부추 하나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책이 두껍다고 겁먹을 필요가 없어요.”

“부추라뇨? 김치를 담그거나 전을 부치는 그 부추 말입니까. 솔·정구지로도 불리죠.”

“그래요. 저는 우리 민족이 가장 먼저 먹은 나물이 부추라고 봅니다. 한반도 첫 사람들의 첫 번째 나물이죠.”

김종원(57) 계명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만나자마자 부추 예찬론을 꺼내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약 21종의 부추가 있어요. 해안 갯바위부터 내륙 습지 언저리까지 서식처가 다양합니다. 일본에서는 부추의 맵고 강렬한 향기를 구린내로 여겨 애당초 먹지를 않았어요. 우리의 독특한 양념문화는 많은 종류의 부추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물 1호’로 꼽았나요.
“단군신화의 마늘도 부추에서 이어진 것으로 봅니다. 선사시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던 사람들은 부추의 자극적인 맛과 향에 빠졌을 거예요. 슬쩍 밟거나 스치기만 해도 향이 뇌리에 박히잖아요. 불교 오신채(五辛菜)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문화죠.”

부추는 맛보기일 뿐이다. 김 교수가 최근 낸 『한국식물생태보감 2』는 방대하다. 우리 풀밭 식물 208종(관련 식물 포함 501종)을 800여 쪽에 풀어놓았다. 2014년 말 나온 1권은 더 두껍다. 총 1200여 쪽에 집 안팎, 논밭, 마을 뒷산에 사는 식물 382종(유사종 포함 760종)을 망라했다. 더 큰일도 남아 있다. 바닷가·암벽·습지 등 삶터를 기준으로 한반도 식물 3800여 종을 총 10권에 담아낼 계획이다. 형태·생태·어원은 기본이요, 각 식물이 우리네 일상과 얽힌 사연을 되짚는 지난한 작업이다. 과학적 사실을 나열한 도감(圖鑑) 대신 세상을 비추는 보감(寶鑑)을 붙인 이유다.
기사 이미지

김종원 교수가 대학원 시절 작성한 필드 노트. 모두 수백 권에 이른다.

지난 20일 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정갈한 ‘ㄱ’자 한옥이다. 집 앞 대나무를 스치는 가을 바람,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풍경(風磬) 등 산사에 들어온 듯하다. “중처럼 삽니다. 공부가 수행이죠”라는 인사말이 실감난다. 집안은 작은 도서관이다. 라틴어·그리스어 사전부터 한자·금석(金石) 자전까지, 『동의보감』부터 일제(日帝)가 편찬한 『조선식물명휘』까지 각종 자료가 빼곡하다. 순간 헷갈렸다. 그는 식물학자인가, 언어학자인가, 아니면 역사학자인가.

“사회식물학이 전공입니다. 쉽게 말해 식물의 입장에서 주민등록증 혹은 호적을 만드는 거죠. 주소(서식처)를 중심으로 각 식물의 가계(계통), 역사(변천), 친구(유사종), 문화(인간과 관계) 등 생명의 얼개를 짭니다. 한국인이 살아온 발자취죠. 예컨대 도라지 하나만 해도 얼마나 눈물겨운가요. 우리가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그 안에 어마어마한 정신세계가 있는데 말이죠.”
어떤 뜻에서 그런가요.
“도라지는 우리 민족의 으뜸가는 식물입니다. 식탁에 늘 오르는 음식이잖아요. 세상에 하나뿐인 1종1속이고, 지구 다른 지역에는 아예 분류군 자체가 없습니다. 한반도가 중심분포지죠. 그런데 일제는 강제로 끌고 간 우리 소녀들을 ‘도라지꽃’으로 불렀죠. 씻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숙제죠.”
나물 하면 고사리 아닙니까.
“1만2000여 종에 달하는 양치식물 중 하나죠. 동북아시아에서도 한반도 사람들이 즐겨 먹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한글 요리서인 17세기 『음식디미방』에 고사리 다듬는 법이 나오죠. 어린 고사리에는 독성이 있어 초식동물은 거의 먹지 않습니다.”
기사 이미지

한국인은 풍성한 나물문화를 빚어왔다. 왼쪽부터 고사리·참산부추·도라지꽃. 예부터 우리 식탁에 올랐던 대표적 식물이다. 풀 하나도 쉽사리 여기지 않았던 조상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사진 자연과생태]

이번에 소개된 식물은 대다수 도시인에게 낯설다. 닭의덩굴·꿩의다리·노루오줌 등 이름조차 생경한 게 많다. 나훈아 노래처럼 ‘이름 모를 잡초’로 불리지만 “세상에 잡초는 없다”는 게 김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김춘수의 시 ‘꽃’처럼 ‘다만 하나의 몸짓’에 그쳤던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낸다. “식물은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라는 믿음에서다. 식물 없는 동물, 나아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온갖 고전을 들춰봐야 하는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었지만 ‘김의털’처럼 이름의 유래를 밝혀 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더할 나위 없다”고 했다.
김의털,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서양에서 주로 양이 뜯어먹었던 길고 가는 풀입니다. 중국에선 ‘양의 털’, 일본에선 ‘소의 털’에 빗댔죠. 우리말 어원은 지금까지 몰랐고요. 17세기 간행된 중국어사전 『역어유해』를 뒤지다가 우리말 ‘기음의털’을 찾았습니다. ‘기음’은 김매기 할 때 ‘김’의 고어일 테죠. ‘김’은 먹기 어려운, 질이 떨어지는 이삭열매 식물을 가리키죠. 이렇듯 모든 이름에는 역사와 문화가 들어 있습니다.”
한반도 식물 3800종을 다 구별할 수 있나요.
“평소 자연의 관상쟁이를 자처합니다. 싹 하나만 봐도 그 식물이 어느 곳을 좋아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를 분간할 수 있어요. 해당 식물의 과거·현재·미래가 머릿속에 있는 테이프처럼 돌아갑니다.”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경북대 생물학과 77학번입니다. 학부 2학년 때 대구 팔공산 산불지역에 실습을 나갔는데 그곳에 꽃며느리밥풀이 살고 있었어요. 교수님께 ‘어떻게 저럴 수 있죠’라고 물었더니 ‘나도 모르겠다. 식물과 환경의 관계를 탐구하는 식물사회학이 있는데 네가 한번 공부해 봐라’고 하신 말씀이 지난 30여 년 제 운명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일본 요코하마국립대로 83년 유학을 떠났습니다. 한국 식물에 관한 자료는 일본에 더 많은 게 현실이거든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 강산의 식물 분포도를 만들 정도였죠. 이후 87년 식물사회학 본고장인 오스트리아 빈대학으로 건너갔어요. 만주·연해주 일대 식생을 연구하고 싶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가 중국·러시아와 수교를 맺지 않아 유럽에서 공부하는 게 유리하다고 봤습니다. 1년에 200일은 답사를 다닌 것 같아요.”
왜 만주와 연해주입니까.
“한반도와 연관이 큰 곳이잖아요. 일본 학자에게 선수를 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80년대 말 두 차례 다녀왔어요. 정말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중국 인민복을 입고 백두산 일대 식물을 조사했고, 소련 KGB 요원의 감시를 받기도 했지요. 목숨을 건, 지금 돌아보면 정말 미친 짓이었죠. 덕분에 한국·중국·일본 참나무 비교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륙성 기후인 한국·중국과 달리 해양성 기후인 일본에서는 참나무를 잡목 취급하고, 대신 너도밤나무가 자연을 대표하죠.”
 
10권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1년에 1권씩 낼 계획입니다. 이후에도 하고 싶은 게 있어요. 한반도 지역별 식생지(植生誌)를 만들려고 합니다. 전국에 안 다녀 본 곳이 없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식생지를 이미 그려놓았죠. 어디에 무엇이 살았고, 지금은 뭐가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아야 개발을 해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몸과 마음이 바쁘겠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도 오류가 많습니다. 제가 못다한 건 후학에게 맡겨야죠. 안타까운 건 한국의 풀밭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풀들이 무덤으로 쫓겨나고 있어요. 무덤이 마지막 피신처인 셈이죠. 그 무덤마저 기념물이 될 수도 있고요. 바빠도 서두르면 안 됩니다. 좌우명이 심한신왕(心閒神旺)입니다. ‘마음이 한가해야 정신이 활발하다’는 뜻이죠. 급하면 실수 연발입니다. 요즘 사회에 딱 들어맞는 말 아닌가요. 이 모든 지혜를 풀에게서 배웠습니다. 저를 만든 10할이 식물인 거죠.”(웃음)
지진 피해 큰 경주, 여기서 신라 문화 시작된 이유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가 크다. 크고 작은 피해가 잇따르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어졌다. 그런데 왜 신라는 경주에서 시작했을까. 신라의 빛나는 문화가 경주에서 비롯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종원 교수는 주변 역사학자에게 이런 질문을 종종 던졌다. “글쎄요.” 뾰족한 대답이 없었다. 김 교수는 경주의 태동을 식물사회학적 관점에서, 즉 기후·식생 등을 잣대로 천년고도 경주의 기원을 살펴봤다.

그는 고대인의 일상이 담긴 울산 대곡천 반구대 및 천진리 암각화에서 단서를 찾았다. 암각화로부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담긴 경주 남산 자락 나정까지의 거리는 약 26㎞. 요즘 마라톤 선수에 버금가는 달리기 실력을 자랑했던 선사인의 하루 보행 능력은 48㎞에 달했다. 두 지역은 동일문화권인 셈이다. 특히 말을 타고 다녔던 신라시대에 두 곳은 일일생활권이었다.

암각화 주변은 선사시대부터 자연환경이 풍요로웠다. 다양한 참나무가 서식해 식량(도토리) 걱정이 없었고 가까운 바다(울산만)에서 소금과 해산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후 또한 온화했으며 동남쪽 영남알프스 지역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풍부했다.

“대곡천 일대는 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회를 발전시킨 터전이었죠. 이 문화가 발전해 경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철기시대 경주는 고대국가가 탄생할 자연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죠. 신라 화랑들이 암각화에 글도 새겨 놓았잖아요.”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