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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미술] 겹눈으로 보는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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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평론가

우리 미술과 서양미술의 흥미로운 차이 하나는,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이 우리에게는 거의 없는 데 반해 서양에는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두 문화권의 죽음에 대한 인식 혹은 태도 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서양에서 죽음을 다룬 미술작품이 많이 나타난 배경에는 무엇보다 기독교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었다. 오랜 세월 숱한 화가들이 이 주제를 그렸다. 성인들의 순교 장면 역시 많은 작품으로 표현됐다. 이에 더해 14세기에 유럽 인구를 3분의 1이나 줄인 흑사병 등 가공할 전염병의 경험 또한 두고두고 죽음을 그리게 했다. 서양인에게 죽음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삶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 예부터 우리는 죽음을 삶으로부터 분리하고 삶 자체에 집중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도시나 마을 안에 공동묘지를 둔 유럽과 달리 무덤을 산자락에 조성했다. 요즘도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킨다 하여 건물이나 엘리베이터로부터 ‘4’자를 빼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이렇듯 죽음을 ‘배제’하는 문화에서 죽음을 시각화하는 것은 그리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해골 등의 설치물로 죽음을 선명히 드러낸 김구림의 ‘삶과 죽음의 흔적’전은 그런 면에서 오늘의 시점에서도 도발적이다(다음달 16일까지,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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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의 설치미술 ‘음양 15-S. 45’. 지중해 난민의 비참한 일상이 연상된다. [사진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그의 ‘음양 16-S. 45’를 보면 흙무더기에 작은 관이 묻혀 있고, 그 관 안에는 아이의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주위에는 핏빛 어린 아기 혹은 태아 인형이 흩뿌려진 채 이른 죽음에 대한 한을 뿜어낸다. 요즘 아동학대로 죽어 간 아이들이 떠오른다. ‘음양 15-S. 45’에서는 하늘 이미지가 비치는 바닥에 보트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사람의 뼈가 보인다.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난민이 지중해에서 표류하다 죽어 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상자에 핵폭발 장면과 무엇엔가 오염된 듯 보이는 뼈 등이 담긴 ‘음양 6-S. 65’는 인류의 생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대량살육 능력을 갖춘 우리 자신임을 고발한다.

김구림은 죽음을 직시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노골적으로 죽음을 드러낸다. 그에게 죽음은 어슴푸레한 은유나 암시로 표현될 그 무엇이 아니다. 특히 이 시대 곳곳에서 숱한 희생자를 낳는 재앙적인 사건은 그로 하여금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죽음에 대해 직설하게 만든다.

이렇듯 형형한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그가 올해로 만 여든이다. 애써 피할 것 같은 주제에 그 어떤 젊은 예술가보다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은, 그가 고독한 전위예술가로서 늘 ‘사즉생(死卽生)’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타이틀이 ‘음양’인 것처럼 삶과 죽음은 애당초 분리될 수 없다. 산 자는 결코 죽음을 배척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삶이든 죽음이든, 행이든 불행이든, 빛이든 그림자든 한쪽만 보아서는 결코 진실을 알 수 없다. 삶은 그렇게 겹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그의 예술은 말한다.


이 주 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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