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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헌법 개정, 기약 없는 표류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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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추석을 지내고 보니 4·13총선 후 다섯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국내외의 엄중한 과제와 도전에 대응하기에는 한국 정치의 모양과 내용이 턱없이 부실하다는 국민적 판단이 총선 결과에 극명하게 나타났었다. 한국 정치 이대로 안 되겠다는 데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실험이 이처럼 답답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단순히 정치의 판을 다시 짜자는 데 그치지 말고 국가 운영의 틀을 고치고 다듬는 헌법 개정으로 연결시키기를 대다수 국민이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 후 반년이 가까워 오는 이 시점에서 정부와 정치권의 개혁 의지에 대한 기대는 급속도로 사그라지고 있는 것 같다. 국회의장이 20대 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매듭짓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지적대로 ‘개헌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인데 정치권에서는 그렇듯 강력한 의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추석 전에 20대 의원 188명이 개헌추진모임을 발의한 데 이어 어제는 전직 국회의장 등 150여 명의 원외인사들이 개헌모임을 출범시켰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지만 이전의 국회에서도 거의 200명에 가까운 의원이 상당한 수준의 연구 조사를 토대로 개헌 작업을 추진했으나 결국 대통령과 각 당 지도부의 소극적 대응으로 결실을 보지 못한 전철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되풀이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권위주의 시대에는 권력자의 의지와 기획에 따라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던 데 반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다수의 국민과 국회의원이 개헌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대통령과 정당 지도자들, 그리고 대통령 지망자들이 개헌운동이나 작업을 직간접적으로 사보타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보수 정당의 체질과 전통에선 국민 여론이나 국회의원 중심의 개헌 노력에 대해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습관화돼 왔다. 한편 4·19 이후 내각제 개헌과 정부 수립에 성공했던 야당도 97년 대선에서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한 내각제 추진에 원론적으로는 합의했지만 이를 실천하는 개혁에는 지금까지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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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한국의 정치권이 국가 운영의 틀, 특히 민주국가 운영의 기본 구조와 절차를 명시한 헌법을 다듬어 가는 데 뚜렷한 의지를 갖지 못하고 상황의 논리에 끌려온 흐름 속에서도 시민단체와 학계에서는 국민의 개혁 의지를 반영하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한 달 전에 출판된 ‘대화문화아카데미 2016 새 헌법안’이 그 대표적 예다. 2006년 헌정 60년을 되돌아보며 헌법을 매개로 국가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성찰해 보려는 일련의 대화모임이 시작돼 2008년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 2011년 ‘새로운 헌법 무엇을 담아야 하나’라는 보고서에 이어 10년에 걸친 노력이 결집된 이번 ‘새 헌법안’은 모처럼 조성된 개헌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부응하는 노력이라고 하겠다.

  현실적 실현 가능성보다는 미래 지향적 규범에 무게를 둔 아카데미 새 헌법안은 기본권의 확대 강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의회, 지금에 비해 약해진 대통령의 힘과 강해지는 총리(내각)의 권력 구조, 수직적 관계를 넘어선 분권형 지방자치, 감사원의 독립 등 많은 토론과 합의를 필요로 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과연 책임 있고 광범위한 토론을 보장하는 개헌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민이 정치권, 특히 각 정당과 대통령 지망자들에게서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은 각자의 헌법 초안이 아니라 지금부터 개헌 절차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시간표의 제시다. 예컨대 올해 또는 6개월 내에 확실한 개헌 진행 시간표를 제시하겠다든가 아니면 대선 이후, 즉 2018년에 진행하겠다는 국민에 대한 약속을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로서 이를 외면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들은 일단 정치 일선에서 후퇴하는 것은 어떨지, 그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사실, 북한 핵 도발과 우리의 사드 배치 결정 등으로 제기된 국내외의 긴장 고조가 헌법 개정의 시급성에 대한 국민이나 정치권의 상황 인식을 흔들어 놓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밑받침하는 것은, 그리고 경제와 사회의 구조조정을 지체 없이 추진하는 동력은 결국 효율적인 국가 운용을 보장하는 민주 정치의 개혁임을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지경일지라도 나라의 기틀인 헌법의 개정이나 대통령 선거와 같은 큰 과제는 우리의 의지와 지혜를 모아 차근차근히 그리고 확실하게 진행시켜 가야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분명한 시간표 없이 표류하는 무책임한 민주국가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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